1992년 첫 작품 ‘저수지의 개들’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후 ‘펄프 픽션’ ‘킬빌’ ‘장고:분노의 추적자’ 등 폭력의 미학이 돋보이는 작품을 연이어 감독하면서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라고 불리기도 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8번째 작품 ‘헤이트풀 8 (Hateful 8)’이란 영화가 있다. 본인의 8번째 영화라 영화 제목에 8이란 숫자를 넣었다고 하기도 하고 8명의 ‘앙심과 증오’에 찬 주인공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난투극을 벌여 8이란 숫자를 넣었다고도 한다.

영화 ‘헤이트풀 8’도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노골적이고 계속되는 폭력으로 영 불편하고 기분 좋지 않은 영화이지만 등장인물 중 교수형 집행인으로 나오는 오스왈도 모브레이가 문명사회와 정의에 대해 다소 길게 내뱉는 대사는 길게 여운이 남는다.

그는 문명사회의 정의(civilized society’s justice)와 개척지 정의(frontier justice)를 구분하면서 문명사회는 자신과 같이 범인에 대해 아무런 증오와 감정이 없는 교수형 집행인이 그야말로 쿨(cool)하게 체계적인 절차를 거쳐 법 집행을 하는 사회라고 한다면, 개척지는 피해자의 친지들이 총을 들고 바로 집행해 버리는 사회를 말한다고 한다. 문명사회에서의 법집행자는 그저 일로서 하는 것이라서 집행을 할 때 통쾌하지도 않고 쾌감을 느끼지 않으나, 개척지에서의 법집행자는 무척 통쾌하고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다만 개척지 정의는 위와 같이 통쾌하다는 장점이 있긴 하나 옳은 만큼 틀릴 확률도 높다고 한다.

내용을“냉정함이 없는 정의 구현은 틀릴 수 있는 위험이 있으며,
그러한 냉정함이 정의의 본질(essence of justice)일 수 있다”

그러면서 그는 위와 같이 냉정함이 없는 정의 구현은 틀릴 수 있는 위험이 있으며, 그러한 냉정함이 정의의 본질(essence of justice)이라고 설파한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피해자의 친지들이 찾아와 문을 부수고 범인을 눈밭으로 끌고 가 목매달 일’은 없다 하더라도, 간혹 위와 같은 냉정함이 없이 ‘증오와 앙심’만으로 형사사법을 이용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경한 광경을 목격할 때가 있다.

특히 그러한 광경을 연출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법조인이라면 과연 그 사람을 문명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황량한 서부에서 ‘앙심과 증오’에 상대방보다 먼저 총을 빼려고 신경이 날카로운 총잡이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한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통쾌하고 만족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혹시 냉정함이 없는 ‘앙심과 증오’로 인한 정의 구현으로 인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헤이트풀 8’처럼 모두의 비극으로 향하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참고로 위 대사는 영화 시작 47분에 등장한다.

 

 

/최성진 변호사

서울회·법무법인(유)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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