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듯하다. 미국의 대통령까지도 코로나에 감염됐으니 말이다. 그러나 코로나가 가져온 결과를 보자면 과연 그런가 싶다. 통계청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고소득층 소득은 오히려 증가하여 소득불균형이 악화되고 있다. 코로나 불황에도 불구하고 ‘명품’ 매출은 급증하고 있다는 기사도 보인다. 팬데믹이 초래한 경제적 위기는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가혹하다.

코로나의 창궐이 도대체 우리의 무엇을 바꾼 것일까? 결과적인 차별이 왜 발생한 것일까? 먼저는 디지털 가속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CEO 나델라는 “우리는 2달 만에 2년 치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필자는 3년 전쯤 화상회의 도입을 준비했었다. 주요 고객군이 스타트업이다 보니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았고 교통 시간을 줄여 업무 효율성을 높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객들이 대면 회의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노력하지 않아도 화상회의가 일상화되는 현실을 보며 나델라의 말을 실감한다. 디지털화에 미리 준비되어 있지 못한 산업군은 그대로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았다. 재래시장이나 오프라인 유통은 큰 폭의 매출 감소를 겪고 있다. 자동화 설비를 갖추지 못했거나 온라인 시장을 준비하지 못한 제조업 역시 큰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또한 코로나는 공동체성을 약화시켰다. 시스템에 의해서 또는 선의에 의해서 작동하던 공동체적인 원조는 이제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접촉 자체가 차단되고 있는 상황에서 감염의 리스크를 부담한 인류애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후원이 끊긴 구호단체나 그 단체의 도움을 받아온 사람들은 더 힘들기만 하다.

최근 이러한 불균등의 문제를 체제의 문제로 보는 의견이 적지 않다. 자본주의 실패가 팬데믹을 초래했다는 지적도 있다. 물론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는 합리적 개인주의라는 저효율의 동력이 코로나 상황을 이겨내지 못한 것은 맞지만, 이를 체제의 문제로 파악하려고 하는 것은 성급하다. 문제 정의가 잘못되면 제대로 된 솔루션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개인의 이기적 속성을 저버린 체제의 실패를 반복할 수도 없는 일이다. 팬데믹 이슈가 이데올로기의 논쟁으로 변질되어서도 안 된다. 이데올로기가 정치적 도구가 되는 것은 철저하게 경계해야 한다.

이것은 실패의 문제가 아니라 변화의 틀로 보아야 한다. 변화의 상황에서는 반응이 중요하다. 인류는 새로운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팬데믹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미래를 여는 열쇠이다. 이제 우리는 공공의 삶의 영역에 더 집중해야 한다. 사회적 경제나 공공선이 정책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고루하게 들릴지 모르는 인류애나 인애의 정치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회에 공의와 정의가 흐르게 해야 한다. 이제 다차원의 공동체가 회복되는 공동체 자본주의가 필요하다.

 

 

/조원희 변호사

서울회, 법무법인 디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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