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두완벽(坡肚阮癖)이란 “동파 같은 마음, 완당 같은 혹애”란 뜻으로, 추사(秋史) 이래 최고의 서예가라고 평가받는 검여 유희강(柳熙綱, 1911~1976)이 인권변호사이자 감사원장을 역임한 한승헌(1934~)의 두 번째 시집 ‘노숙(露宿)’ 발간을 축하하며 써 준 글이다. ‘노숙’ 앞에는 검여의 글씨가 쓰여 있는데, 검여는 1972년 ‘검여서실’에서 서예를 배우던 한 변호사에게 아호로 ‘산민(山民)’을 지어주고 이를 직접 써주었다. 전북대 학보사 시절부터 시(詩)로 빈 지면을 채울 만큼 감성이 풍부했던 한 변호사는 ‘노숙’ 외에도 1961년 첫 번째 시집 ‘인간귀향’을, 2016년 세 번째 시집 ‘하얀 목소리’를 출간했다. ‘하얀 목소리’ 첫머리엔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고단한 생명들에게 손이라도 한 번 더 흔들어 줘야지”라는 애민(愛民)의 글귀가 적혀있는데, 이는 40년 먼저 세상을 떠난 검여의 예술혼과도 상통하는 부분이다.

“한고인불견아(恨古人不見我: 옛사람이 나를 보지 못함이 한스럽구나)!”라는 구절을 즐겨 쓴 검여는 세기를 앞서간 추사와 천년을 뛰어넘은 동파 소식(東坡 蘇軾, 1037~1101)의 마음을 좇아 동시대 귀인들과 교류하며 우정 어린 글귀를 담았다. 1968년 화가이자 친구인 배렴(裵濂)의 장례식에 만장(挽章; 돌아간 이를 생각해 지은 글)을 써주고 돌아오는 길에 쓰러져 왼손을 제외한 몸의 마비를 앓았지만, 1년 만에 일어나 왼손으로 새로운 경지의 좌수서(左手書)를 개척했다. 서예로 일궈낸 극복의지, 이는 예술이 표면의 형식이 아닌 진정 어린 관계와 소통에 있음을 시사한다. 중국·일본과 달리 서예가 봉건시대의 유물로 치부된 것은 일제강점기 조선 문인들의 유학(儒學)이 배척된 까닭이기도 하지만,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 뜻에서 어우러지는 문자의 향취)를 아는 지식인 문화가 사그러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몇 해 전부터 서예 열풍이 부는 이유는 무슨 까닭일까. 이례적으로 지난해 LA 카운티뮤지엄에서는 ‘Beyond Line’ 한국서예전이, 베이징 중국국가미술관에서는 ‘추사 김정희와 청조 문인과의 대화’ 전시가, 올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한국 근현대 서예전-미술관에 書’이 열렸다. 이들 전시에서는 글자의 기교가 아닌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재조명되었다. 평생을 불합리한 재판을 받는 약자들을 위해 활동한 한 변호사가 성균관대박물관 전시에 내어준 글귀 ‘파두완벽’ 이것은 단순한 글씨가 아니라 시대를 살아낸 지식인들의 우정이자 관계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유희강, 파두완벽, 25×130cm, 1968, 한승헌 소장 (출처: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유희강, 파두완벽, 25×130cm, 1968, 한승헌 소장 (출처: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왼손으로 글씨를 쓰고 있는 검여 유희강의 모습 (출처: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왼손으로 글씨를 쓰고 있는 검여 유희강의 모습 (출처: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한승헌 변호사의 두 번째 시집, 『노숙(露宿)』 (출처: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한승헌 변호사의 두 번째 시집, 『노숙(露宿)』 (출처: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인권의 역사를 기록한 한승헌 변호사(출처: http://home.ebs.co.kr/seat/main)
인권의 역사를 기록한 한승헌 변호사(출처: http://home.ebs.co.kr/seat/main)

 

* 성균관대학교박물관 https://swb.skku.edu/museum/

* 온라인 전시링크 https://gallery.v.daum.net/p/premium/sodongpa

 

/안현정 예술철학박사

성균관대박물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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