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신임 서울 남부지검장으로 이정수 대검 기획조정부장을 임명했습니다. 이 지검장은 2017년 국가정보원에 파견됐고, 현 정부가 추진했던 ‘국정원 적폐 청산을 위한 TF’에서 활동했던 이력이 있습니다.

저도 당시 출입처가 국정원을 포함한 외교안보팀이라, 국정원TF에서 발표한 보도자료를 봤던 기억이 났습니다. 현 정권 출범 직후였는데, 부처별로 ‘적폐 청산기구’를 만들고 성과를 발표하느라 한동안 시끄러웠지요. 당시 임종석 비서실장이 각 부처에 공문을 보내, 적폐 청산기구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어찌 됐든 이 지검장 임명으로 떠올린 ‘적폐’란 단어는 어쩐지 아득합니다. 이제는 좀처럼 쓰이고 있지 않아서요.

‘적폐’단어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오랜 세월 사회 곳곳에 누적된 적폐를 개혁하겠다”라고 말한 때부터 유행했습니다. 세월호 침몰 원인을 과거에 쌓인 사회 시스템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엿보이죠. 이 단어를 문재인 정부가 고스란히 물려받은 겁니다(구글 트렌드 사이트를 통해 찾아보니, 과거 5년 중 현 정권 출범 직후인 2017년 5월 중순 사람들이 ‘적폐’ 단어를 가장 많이 검색했습니다). 이후 이 지검장이 활동했던 국정원TF에서 “국정원이 여론 조작을 위한 댓글 팀을 운영했다”는 의혹을 밝히는 등 각 부처 청산 기구들의 성과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에는 힘이 있어서, 이 ‘적폐’라는 말은 또 다른 ‘폐단’을 낳고 말았습니다. 제가 5년간 특정 부처를 출입하며 지켜본 바로는 일부 공무원에게 주홍글씨를 새기는 데 이용됐습니다. 평생을 북미외교에 헌신했던 한 고위 외교당국자는 이유도 못 듣고 수차례 청와대 조사를 받았는데, 거기서 “핸드폰 캘린더를 보니 보수 매체 기자들과만 밥을 먹었네요” “H일보 기자 전화는 왜 안 받았죠”라는 질문을 받았답니다. 그는 적폐로 찍혔고, 마땅한 공관 자리를 받지 못하고 외교부를 나왔습니다. 대일 외교에 힘써온 또 다른 외교당국자도 ‘적폐’로 불렸는데, 기자 앞에서 실언을 했다는 게 보도된 후 속전속결 징계를 받고 한직으로 물러났습니다. 다른 부처도 마찬가지입니다. ‘적폐’ 낙인이 온 동네에 영향을 미쳤는지 말단 사무관에게도 “저는 적폐니까요”라는 자조적인 말을 듣곤 했습니다. 평생을 국가에 헌신한 공무원들을 ‘적폐’로 낙인찍은 죗값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제게는 이 단어가, 무리에서 겉도는 아이를 ‘찌질이’같은 표현으로 낙인찍고, 따돌리는 말처럼 들립니다. 다행히 적폐라는 단어는 이제는 정부 차원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 듯 합니다(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우스갯소리로 ‘이제 자기들이 적폐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무섭습니다. 또 다른 표현이 나오지 않을까요? 보복의 정치는 언제쯤 끝날까요?

 

 

/이채현 TV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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