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사건, 특히 성폭력이나 데이트폭력 관련 사건에서 합의와 공탁이 어려워 고생하시는 변호사님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수사 초기부터 여러 차례 합의 의사를 전달했지만, 피해자가 합의를 원하지 않고 공탁 또한 받지 않겠다고 하여 결국 금원만 준비한 채 1심 판결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사건을 실제로 지금 가지고 있기도 하다. 유사한 사건에서의 합의금보다 많은 금액을 준비하여 우리 사무실 계좌에 넣어놓고 “피고인은 언제라도 피해자의 의사에 따라 손해를 배상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피고인이 피해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너그러이 살펴 달라”고 재판부에 호소했지만, 합의와 공탁이 불발된 상황에서 재판부가 살펴보실 쪽은 피고인의 사정보다는 피해자의 엄벌 탄원 의사일 것이 자명하니, 피고인의 가족과 변호인은 그저 가슴 졸이면서 실낱같은 가능성을 바라보고 있다.

형사공탁은 민사상 변제공탁 제도를 합의가 어려운 형사 절차에서 활용하는 것으로,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상당 금액 공탁’을 일반 양형인자 중 감경인자로 정하고 있다. 살인, 성범죄, 강도, 약취·유인·인신매매, 지식재산권범죄, 교통범죄 등에서 공탁이 감형요소로 고려된다. 그러니까 형사공탁은 합의가 어려울 경우 피고인이 부리는 꼼수나 편법이 아니라, 법원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양형사유이다.

그러나 공탁을 위해서는 피해자의 이름과 주소, 주민등록록번호를 알아야 하는데, 범죄 피해자의 개인정보는 ‘특정범죄신고자 등 보호법’ 등 관련 규정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고 있기 때문에 피고인으로서는 공탁을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된다. 피고인 측이 이미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가 자신의 개인정보를 공탁을 위해 활용하는 데 동의하지 않은 이상 공탁 자체가 불가하고, 만약 공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재판부가 이를 양형에 거의 참작하지 않기 때문에 형사공탁 제도가 유명무실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현행 형사공탁 제도와 관련 관행이 2차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을 변호사님들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탁을 위해 피해자의 신상을 알아내려 하고, 거절하는 피해자에게 직접 또는 주변인을 통하여 계속 연락하여 합의와 공탁을 부탁하는 일이 피해자의 입장에서 큰 심리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 피해를 입은 사실 자체로 힘든 피해자가 이처럼 피고인의 합의와 공탁을 위한 노력 때문에 또 다시 고통받는 일은 온당치 못하고, 법과 판례를 통하여 이러한 폐해를 방지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하여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형사공탁 제도를 아예 없애는 것이 답이 될 수 있을까. 자주 볼 수 있는 경우는 아니지만, 합의는 원하지 않더라도 어려운 형편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조속히 손해를 배상받고자 하는 피해자도 있는데, 민사소송에는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고 형사배상명령을 통하여서는 충분한 배상이 어렵다고 한다면, 형사공탁이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인적사항이 알려지는 것만 아니라면 공탁을 받기를 원하는 피해자들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공탁 과정에서 피해자 인적사항이 피고인 측에 알려지는 일, 피고인의 공탁 시도로 인하여 피해자가 또 다른 심적 고통을 겪는 일이 제도적으로 방지될 수 있다면, 형사공탁은 피고인 입장에서는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재판부에 알릴 수 있고, 피해자 입장에서는 피고인을 용서할지 여부와 관계 없이 금전적인 부분에서 어느 정도의 손해 배상을 간이하게 받을 수 있는 유용한 제도가 될 수 있다.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거액의 공탁금을 낸 사실만으로 감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는 법원이 범죄 유형과 죄질, 피해의 정도 등에 따라 공탁을 양형요소로 참작할지 여부 및 참작한다면 그 정도를 어떻게 할지에 관한 기준을 세부적으로 마련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고, 그러한 기준이 명시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지금도 법원이 거액의 공탁이 이루어졌다는 사유만으로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형을 한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미 피해자의 개인정보 대신 해당 형사사건의 사건번호와 사건명 등을 기재할 수 있도록 한 공탁법 개정안이 2017년 5월과 같은 해 10월 각각 여당 의원과 야당 의원에 의해 발의된 바 있고, 국회 법사위는 2018년 9월 법안심사제1소위에서 두 법안을 다루었다. 당시 법사위는 검토보고서에서 “피해자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피해 회복을 위하는 동시에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사죄를 표할 기회를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했고, 여야 모두 법 개정 취지에 공감했으며, 대법원과 법무부 간에도 이에 관해 크게 의견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형사공탁 제도는 사건 당사자들과 변호인, 재판부 어느 쪽 입장을 살피더라도 개선될 필요가 있고, 이미 성폭력범죄 사건 등에서 가명조서를 활용한 수사와 재판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구체적인 개인정보 대신 사건번호와 사건명, 공소사실 항목 등을 기재하는 방법으로 피해자를 특정하여 공탁하도록 하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검경수사권 조정, 공수처 설치 등 굵직굵직한 현안이 많고, 코로나19로 국가와 사회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당장 하루하루가 절실한 형사사건의 당사자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인 만큼 조속히 제도 개선에 관한 논의가 진행될 수 있기를 바란다.

/박아롱 변호사ㆍ충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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