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닷물이 물결치는 해양섬 오랑시에 쥐가 죽어가고 있다. 쥐의 사체가 오랑시를 뒤덮는다. 그리고 의사 리외의 병원동 관리인 미셀은 40도의 고열로 죽음을 맞이했다. 리외의 진단으로는 페스트였다.

열병으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이들이 늘어났지만, 시당국은 전염병을 페스트로 공표하는 데 주저했다. 결국 프랑스 정부에 의해 도시는 폐쇄되고 사람들은 서로 격리됐다. 바깥 사람들이 오랑시에 들어오는 것은 가능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랑시로 향하는 기차와 선박은 끊어지고 거리의 가게들은 문을 닫게 됐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해수욕장을 향했던 인파들은 죽음의 공포 앞에 성당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됐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를 신의 심판으로 규정했다. 신부의 설교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사 리외는 보건위생대를 조직해 질병과 혈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섬의 여행객 타루는 보건위생대를 조직하는 선봉장이 됐고, 시당국의 공무원 그랑은 전염병 통계치를 만드는 일을 했으며, 외부에서 섬을 취재하러 온 랑베르 기자도 리외를 돕는 일에 함께했다. 리외가 전염병을 치료한 방법은 혈청을 주사하고 종기를 제거하는 방법이었다. 4월에 시작된 전염병은 10월에 출시된 의사 카스텔의 혈청주사로 줄어들지만, 리외는 전염병을 치료하면서 판사 오통의 아들의 죽음, 오통의 죽음 또 파늘루 신부의 죽음, 끝으로 타루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1년이 지나 페스트는 죽고 도시는 다시 살아났다. 작별했던 이들이 뜨겁게 포옹했고 섬을 향한 뱃고동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오랑시가 페스트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의사 리외의 헌신과 보건위생대를 만든 타루와 주변인들의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페스트 치료제는 곧 공동체의 연대의식이었다.

2020년을 맞아 지구가 코로나를 싣고 자전과 공전을 한지도 반년이 훌쩍 지났고, 그 사이 코로나는 지구를 몇 바퀴 돌고 있다. 지구는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코로나를 묵인한 국가와 코로나에 무관심한 국가들 간 대화는 줄어들고 서로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코로나를 맞이해 바이러스 확산을 둘러싸고 책임 공방을 벌이는 한국사회의 속 모습을 들여다보면 코로나가 주입한 죽음의 공포로 증오와 분노, 갈등과 분열이 잉태되고 있다. 모두 코로나와 함께 살고 있음에도, 코로나 때문에 서로 싸우고 있다. 정작 함께 싸워야 할 것은 코로나임에도.

오랑시의 공중위생대를 만든 타루가 이를 목격한다면 지구를 향해 어떤 말을 던질까. 차장검사의 아들이었던 그가 사형제도에 혐오를 갖고 법조인의 길을 포기한 경험을 들려줄 듯하다. 그에 따르면 페스트보다 더 위험한 것은 내면의 페스트이며,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죽임이라고 한다. 진정 그의 말대로 파늘루 신부가 페스트를 신의 심판으로 규정하듯 인간이 선과 악을 구분하고 이를 통해 서로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은 페스트보다 더 위험한 병원균이었다. 

내가 읽은 페스트는 코로나를 죽일 치료제를 개발하기 전 먼저 필요한 것은 상대방을 향한 죽임을 죽이고,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인간애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박상흠 변호사ㆍ부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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