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이다. 한 지방법원 공보판사에게 문자를 받았다. 형사사건 피의자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 결과였다. 발부였다. 사유가 짧았다. “도주 우려가 있다.” 피의자는 살인 미수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었다. 법원은 10자(字)도 안 되는 사유로 구속 결정을 내렸다. 다른 사건 피의자에 대한 영장실질심사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어떤 판사가 심리하든 마찬가지였다. ‘범죄 혐의’ ‘도주 우려’ ‘증거인멸’ 20자 남짓으로 영장 발부 여부가 결정됐다. 참 기계적이었다.시간이 흘렀다. 법원도 변해간다. 불과 몇 달 전, 최창훈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175자 분량의 영장 발부 사유를 발표했다. 피의자는 위계상 공무집행 방해 혐의를 받았다. 최 부장판사는 영장을 발부하며 “증거 인멸 및 도망갈 염려가 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발부 사유 곳곳에 ‘어느 누군가는 정당하게 경쟁하지 못하고’ ‘패배하는 아픔을 겪었을 것’이라는 말을 넣었다. 김동현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도 빼놓을 수 없다. 올해 상해 혐의로 입건된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1000자 넘는 사유를 썼다. 단순히 길기만 한 게 아니다. 기각 사유에서 “한 사람의 집은 성채” “비록 범죄 혐의자라고 할지라도 헌법과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주거의 평온을 보호받음에 있어 예외로 둘 수 없다”라고 했다. 온도가 느껴졌다.

변화는 법정에서도 보인다. 올여름 한 범죄인 인도심사에서 보였다. 재판장인 강영수 서울고법 수석부장판사는 주문 낭독에 앞서 이례적으로 사건의 성격을 설명했다. 이미 송환 불허 결정에 따른 근거를 제시한 그였다. “범죄인을 청구국에 인도하지 않는다”는 짧은 고지면 충분했다. 그런데도 강 부장판사는 주문 낭독을 잠시 미뤘다. “이 사건이 우리 사회의 지대한 관심을 받게 된 원인은 그동안 범죄인에 대해 우리 국민의 법감정에 부합한 형사처벌이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범죄인을 미국으로 보내 엄중한 형사처벌을 받게 하고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 법원도 공감한다.” 설명은 조곤조곤했다. 그리고 제법 오랜 시간 이어졌다.

일각에선 이런 변화가 못마땅한 눈치다. 한 현직 부장판사는 “어려운 심사일수록 사유는 짧아야 한다”며 “판사는 판결로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소신껏 하면 되는데 검찰과 여론의 눈치를 보니 말이 길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일리가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변화가 싫지 않다. 설명이 조금 긴들 발부가 기각으로, 유죄가 무죄로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 당사자를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말이 짧은 게 반드시 미덕은 아니니 말이다.

/조성필 아시아경제 기자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