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 인체 표현의 장르인 누드(nude)는 비평가들이 알몸인 네이키드(naked)와 구분하기 위해 18세기 초에 만든 용어이다. 그러나 누드를 “예술로 보느냐, 외설로 보느냐”는 시대 분위기에 따라 결정된다. 사회 관습에 따라 때로는 외설로 때로는 예술로 간주되는 누드작품의 논란은 인체표현의 과도성으로부터 시작된다. 포르노그라피인가 아닌가의 평가이다. 실제로 ‘pornography’는 그리스어인 ‘pornei(창녀)’와 ‘graphein(그리다)’의 합성어로, 어원상 창녀 그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를 비켜 간 사례가 있으니 바로 ‘비너스’라는 이름의 신화화다.

르네상스 이후, 그리스 로마신화의 소재 가운데 감상과 교양의 측면에서 가장 많은 컬렉터와 화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것은 단연코 ‘비너스(아프로디테)’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의 인체 누드가 원칙적으로 금지됐던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많은 이들은 ‘아프로디테’의 이름을 빌어 인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였다. 고전미의 전형인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에게해에서 발견된 ‘밀로의 비너스(기원전 130~90년)’의 자세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러나 형태에 있어서는 어떤 행위성을 유발하지 않기에 외설적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우피치미술관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우피치미술관

문제는 서 있던 비너스가 눕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르네상스 이후 비너스는 현세적 모습, 이른바 인간의 욕망을 형상화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의 베네치아 화가들인 지오르지오네의 ‘잠자는 비너스(1510년)’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년)’가 대표적이다. 전자가 그리스 전통을 살리면서도 고전 시대와는 다른 최초로 누운 비너스를 그렸다면, 후자는 살집이 좋은 육감적이고 관능적인 지상의 여인으로 변모시켰다. 티치아노에 이르러 누운 비너스의 배경은 실내로 바뀌고, 지그시 감은 눈은 화면 밖 감상자를 빤히 쳐다보는 형태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비너스란 이름을 가졌을 때는 어느 시대든지 외설 논란으로부터 제외될 수 있었다.

고야, 옷을 벗은 마야, 1800-1803년, 프라도미술관
고야, 옷을 벗은 마야, 1800-1803년, 프라도미술관

문제가 된 것은 고야의 ‘옷을 벗은 마야(1800~1803년)’부터 였다. 엄격하게 금지되어 온 여성의 누드를 대담하고 도발적인 이미지로 그려 보수적인 가톨릭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대담하고 관능적인 여성의 모습은 신화의 베일을 벗어 던지고 거부할 수 없는 풍만한 여인으로 당대와 마주했다. 고야는 이 그림으로 1815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조사까지 받았다.

마네, 올랭피아, 1863년, 오르세미술관
마네, 올랭피아, 1863년, 오르세미술관

이러한 분위기는 1865년 봄, 프랑스 살롱전에 출품하여 각종 언론에서 비난을 받은 마네의 ‘올랭피아(1863년)’로까지 이어진다. 고객이 가져다 준 꽃다발과 선물의 포장지처럼 목에 맨 검은 리본의 창녀가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폐적이라는 견해는 20세기 전환의 시대와 만나면서, 프랑스의 오르세미술관이 사랑하는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전환되는 쾌거를 누린다. 말 그대로 ‘비너스’라는 제목은 부르주아적 도덕성을 막기 위한 전통시대의 상징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안현정 예술철학박사

성균관대박물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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