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지금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개념을 그저 외워야 하느니 하고 지냈던 학창시절, 역사를 배울 때마다 우리 고조 단군께서 하필 이다지도 구석진 곳에다 터를 잡아 나라를 세우셨을까 어린 마음에 나름 불만이 많았음을 고백한다. 3면이 바다이고 반도 국가이자 이웃이라고 해 봐야 중국과 일본이 전부였던 우리의 반만 년 역사에 이런 지정학적 위치가 미친 영향은 결정적이었으니, ‘조용한 아침의 나라’ 등으로 미화된 채 주변부 사수에 그치거나 드센 이웃에 시달리며 약소국으로서의 풍파를 겪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현대사를 지나 반세기 동안 세계가 놀란 경제성장과 문화강국으로서의 위상 정립 등 우리나라가 이룬 기적과도 같은 성과는 이런 지정학적 불리함을 극복하고 심기일전해 세계무대로 진출한 덕분이고, 결국 부국(富國)의 첩경은 국제통상분야에서의 활약에 달려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그동안 국제상거래 관련 종사자를 제외한 대다수에게 WTO 현황 등 국제통상에 관한 문제들이 당장의 내 일이 아닌 남의 동네 얘기처럼 취급되던 경향이 많았으나, 무역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은 우리로서는 국제통상무대에서 벌어지는 총성 없는 전쟁에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신속하고도 체계적인 대응 태세를 상시 구비해 만전을 기할 필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최일선에서 훌륭한 전문가들이 활약 중이나, 우리나라의 GDP 규모와 국제적 위상, 무역의존도 등을 고려하면 더 많은 전문가가 함께 함으로써 그 저변이 확대될 필요가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다행히 일본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규제로 인한 한일 간 분쟁, 그리고 일본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한 보복성 무역규제조치 등으로 근래 들어 WTO 분쟁해결절차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본 지면을 통해 WTO 분쟁해결절차를 개관함으로써 많은 이들의 관심과 이해도를 조금이나마 높일 수 있는, 미약하나마 의미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인류 전체가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연결될 수 있음을 절감케 한 전대미문의 제 1, 2차 세계대전은 사람들에게 많은 각성을 불러일으켰고, 보호무역주의와 식민지배를 통한 제국주의 팽창 같은 비극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로써 1947년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체결되어 자유무역을 수호하고자 하는 각국의 열망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

GATT 체제는 반세기 이상 세계무역질서의 큰 틀로서 작동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드러난 내재적 한계로 명을 다 하고,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의 결과물로 ‘마라케쉬 의정서(Marrakesh Agreement Establishing the World Trade Organization)’가 최종 채택됨으로써 새로운 국제기구인 세계무역기구, 즉 WTO를 중심으로 한 체제가 출범하게 되었다.

WTO 체제는 GATT 체제를 수용하면서도 진일보한 규제의 틀을 마련하였고, 그 중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내용으로 분쟁해결기구(Dispute Settlement Body)를 마련하여 회원국 간 통상분쟁에 대하여는 독자적인 절차와 법의 지배를 가능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외교관에 대한 법률가의 승리(Lawyers’ triumph over Diplomats)”라는 호평과 찬사를 끌어낼 만큼, 힘의 논리가 아닌 누구나 평등하게 적용되는 규정에 따라 그 사법적 판단을 가능하도록 하는 독립기구를 설치하였다는 점에서 중차대한 의의를 갖는다.

WTO 협정 제2부속서인 ‘분쟁해결절차에 관한 양해각서(Understanding on Rules and Procedures Governing the Settlement of Disputes, DSU)’는 분쟁해결절차 전반에 관한 근거규정으로서, 제3.2조에 아래와 같은 선언을 담고 있다.

“The dispute settlement system of the WTO is a central element in providing security and predictability to the multilateral trading system. The Members recognize that it serves to preserve the rights and obligations of Members under the covered agreements, and to clarify the existing provisions of those agreements in accordance with customary rules of interpretation of public international law…(후략).”

다자무역체계에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을 제공하고, WTO 회원국들의 협정상 권리의무가 상호 양해된 방식과 국제규범에 의하여 명확해지며, 힘의 논리로 자력구제를 취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위 선언의 의의처럼, WTO 출범 후 25년간 운영되며 입지를 굳힌 분쟁해결절차는 최초 구상되었던 기획자들의 손을 떠나 이제 나름의 역사를 만들며 스스로 생동하는 존재가 되었다.

 
 
/노유경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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