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경제와 정치를 타고 흐른다. 수염 달린 모나리자(마르쉘 뒤샹), 뚱뚱한 모나리자(보테로), 파스타 광고의 모나리자(Prince社) 이들은 다른 용도로 번안된 현대를 사는 모나리자다.

미술은 몰라도 ‘모나리자’는 아는 우리들. 심지어 값싼 화장지의 대명사로 사랑을 받아온 두루마리 휴지 이름도 모나리자다. 우리는 왜 ‘500년 전의 미완성작’ 모나리자에 열광하는가. 1911년 이 작품이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루브르 앞 광장에 운집해 통곡할 정도였다.

그런데 도대체 왜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무덤과 모나리자는 출신지인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에 있을까?

‘모나리자(Mona Lisa)’는 리자 부인이란 뜻이다. ‘모나’는 이탈리아어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이다. ‘리자’는 몰락한 귀족 가문의 맏딸로 태어나 ‘조콘다’라는 20살 연상의 부유한 상인에게 시집을 간다. 리자와 결혼한 조콘다는 자식을 여럿 낳고 사업이 번창하자, 집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리자에 대한 사랑을 알리고자 당대 최고의 화가인 ‘다빈치’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

당시 회화는 왕과 귀족의 초상 혹은 종교적 목적 외에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다빈치가 평범한 상인의 부인을 모델로 세워 그림을 그렸다는 점은 그 자체로 ‘르네상스적 대전환’ 이른바, 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전환되는 최초의 붓질로 해석된다.

피렌체 근처의 빈치 마을 출신인 다빈치는 르네상스 3대 거장인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스승격인 작가로, 전성기 르네상스의 기수였다. 그가 머무는 곳이 곧 시대의 주인이었으며, 정치가 혼란하여 경제적 후원이 끊긴 경우 그는 자신을 찾는 권력자의 의뢰를 찾아 이동했다.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전전하던 다빈치는 도시국가 간 전쟁으로 더이상 후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1516년 프랑스행을 결정했고, 시종 한 명과 함께 알프스 국경을 넘었다. 현재 루브르가 소장한 ‘성안나와 성모자상’ ‘모나리자’ ‘세례자 요한’은 환갑을 넘긴 다빈치가 손수 프랑스로 가져간 것들이다.

다빈치를 부른 이는 20대 초반의 프랑수아 1세. 이들은 다빈치가 죽기 전까지 3년간 앙부아즈성과 인근 끌로 뤼세 성을 오가며 우정을 쌓았고, 프랑스의 르네상스가 열리는 기틀을 마련했다. 도미니크 앵그르가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죽음(1818)’이라는 작품 안에는 67세의 다빈치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두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예술가의 죽음이라고 평가받는다. 다빈치의 거처가 당대 문화예술의 주인을 가르는 결정적 나침반이었던 셈이다.

/안현정 예술철학박사

성균관대박물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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