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2월 6일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에게 파직명령과 함께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는 직위가 해제됨은 물론 의금부에 투옥되었고, 고문을 받아야 했다. 선조실록에는 이순신의 사형을 준비시킨 내용이 들어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정탁의 구명탄원 등에 힘입어 그는 극적으로 살아났다. 살려주되 백의종군하라는 어명이었다. 1597년 4월 1일 이순신은 감옥에서 풀려났다. 모함, 신분 강등, 고문, 예비된 사형, 백의종군, 심지어 그 와중에 겪은 어머니 상까지. 얼마나 많은 상념들이 그의 마음 속에 교차되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소일에 적은 그의 일기는 건조하다. “맑음. 감옥문을 나왔다.” 부지런하고 꼼꼼한 기록자였던 이순신이었지만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쓰지 않았으며, 술자리에서조차 부하들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해 7월 16일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일본의 간계에 빠져 칠전량으로 들어간 우리 수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참패를 하고 만다. 판옥선 130여척이 궤멸됐고 군사는 전의를 상실하였으며, 국운이 기우는 듯하였다.

다급해진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게 된다. 그가 돌아온 남해의 진영은 그야말로 형편없는 상태였다. 배는 12척에 불과했고 남은 군사가 120인이었다. 이 처참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국운을 되살려낸다.

“신에게 아직도 12척이 남아있습니다.” 장군의 비장함과 숙연함을 그 어떤 말로 대신할 수 있었을까. 이순신은 이 초라한 병력으로 명량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 300여척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이순신이 마음에 품었던 오직 한 가지 신념은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리라.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그때, 장군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은 남해안을 장악하였을 것이고 전라도 곡창지대를 손에 넣었을 것이며, 나라의 운명은 겉잡을 수 없이 흔들렸을 것이다.

이순신은 자신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을 헤아리다 보면, 가슴깊은 곳에서 울컥 눈물이 치민다. 자신이 모함을 당한 것에 대해서도, 임금이 자신을 죽이려 함에도, 자신의 직위를 잃고 비참한 신세가 되었음에도 장군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을 비방하지 않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12척이 남아 있다고 비장한 의기를 일깨운 장군의 말은, 우리 가슴 속에 새겨진 숭고의 정신이다. 함부로 조롱거리나 비아냥거리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될 우리의 신성한 묘역이다.

그가 사무치도록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이순신은 죽었지만 장군의 정신은 언제까지나 우리 가슴 속에 영원할 것이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가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너희 장수들은 절대로 살 생각을 하지 말라.”

* 김훈 『연필로 쓰기』 중 ‘내 마음의 이순신’ 참조

 

 

 

/이재진 변호사

경기중앙회·법무법인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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