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주의 대표적인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가운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 전형적인 모습의 파이프가 그려져 있는데 그 밑에 글귀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혀 있는 그림이다. 말과 대상은 함께 하나의 형상을 구성하지 않고 있고, 그것들은 정반대로 상이한 두 방향을 향하고 있다(미셀 푸코).

언어는 우리가 표현하고자 염두에 둔 대상을 특정하고, 이를 표현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자신이 알리고자 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의 역할을 한다. 이로써 언어는 인간의 문명 발달에 가장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 종이 세상을 정복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언어 덕분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언어가 대상과 분리되면, 언어는 소통의 부재 상태를 만들어낸다. 위의 르네 마그리트 그림에서와 같이, 파이프인데 파이프가 아니라고 한다면, 언어는 대상과 연결되지 못하고 부표처럼 떠돌게 된다.

반대로 파이프가 아닌데 파이프라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파이프라는 언명이 파이프라는 대상을 지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대상인 파이프를 파이프라는 말로 사용하기로 한 것은, 일종의 규칙이고 약속일 뿐, 본래적인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파이프가 아닌 다른 말로 표현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존재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대상인 파이프의 언명은 파이프이어야만 상대방과의 의미 전달이 가능하다. 파이프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언어는 지시대상을 놓치게 되고, 소위 기표(표시)와 기의(의미)가 분리되는 현상을 가져온다. 안타깝게도 현대의 언어는 이렇듯 기표와 기의가 괴리되면서, 우리들 사회는 의사소통이 단절되고, 부조리와 모순이 상존하게 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독일의 나치 강제수용소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고 한다. “Arbeit macht frei(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문구는 노동의 찬양과 수용자들의 자유를 위한 것으로 읽혀지지만, 그곳의 실상은 비참하고 참담한 것이었다. 독재정부에서도 민주주의를 슬로건으로 내걸지만, 그 “민주주의”가 진정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막말과 독설이 난무한다. 그러나 그 말들에는 지시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거나 무의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이 대상을 잃고 떠다니게 되면 소통의 단절을 넘어 악의만이 전달되는 모순을 낳게 된다.

어느 식당에서 주고받던 주인 부부의 대화가 떠오른다. 아저씨는 “거시기 하니까 거시기 하라”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행동한다. 소통부재의 현란한 언어보다, 투박한 식당 아저씨의 ‘거시기’가 오히려 더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언어보다는 마음과 공감이 더 소중한 탓은 아닐까.

 

 

/이재진 변호사

경기중앙회법무법인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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