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소개했듯 루소는 단 한 가지 거짓말, 17세 때 여주인의 리본을 훔치고 하녀 마리옹에게 누명을 씌운 일로 평생을 괴로워했다. 그는 산책 중 과거를 회상하며 옛 경험을 깊이 명상을 해보았다. 진실과 거짓은 무엇인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과 거짓을 말하는 것은 같은가, 다른가. 진실을 말할 의무가 진실의 유용성에 있는 것인가. 선의의 거짓말은 허용되는 것인가. 그가 내린 결론은 언제나 진실하자는 것이다. 속이려는 의도가 뜻하지 않게 해치려는 의도와 결부해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 자신을 위한 거짓말은 어떤가. 내가 부끄럽기 때문에 숨기는 것마저도 양심에 따르는 것이 낫단다. 다만 한 어린아이가 나무망치로 자신을 찍어 머리에 피가 흐를 때, 아이의 엄마에게 거짓말로 아이의 실수를 덮어 준 것은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그가 거짓말을 진실의 유용성의 기준으로 나눈 바에 의하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거짓말 하는 것’은 ‘사기’이고, 남의 이득을 위해 거짓말 하는 것은 ‘기만’이며, 해를 끼치기 위해 거짓말 하는 것은 ‘중상’으로 가장 악질적으로 평가한다.

루소의 해제는 형법이 법정에서 피고인이 본인을 위해 거짓말을 할 때는 처벌하지 않고, 증인이 위증할 때 처벌하는 이유를 알려주는 듯하다. 피고인의 거짓말은 자기 이익을 위해 그 효과가 이에 국한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위증은 자신을 위한 거짓말이 아니라 잘못을 범한 타인을 위한 거짓말일 뿐만 아니라 대립되는 재판의 당사자 중 진실을 말하는 사람의 말을 거짓으로 간주하도록 현혹하고, 거짓을 말하는 사람의 말을 진실한 말로 둔갑시킴으로써 재판관으로 하여금 공정하고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방해로 오판을 초래할 경우 진실에 선 사람이 거짓에 패배하도록 판정해 정의롭지 못한 판결을 목도한 그로 하여금 법원에 대해 깊은 불신감을 갖게 만든다. 한 사람의 불신은 여러 사람으로 확장되고 그 불신은 사회전체로 확산될 수 있다. 결국 재판에 대한 불신은 법원 업무의 피해로 연결되는 것이다. 반대로 거짓에 선 사람은 실제 잘못한 행위에 대해 옳다고 인정 받음으로써 반성의 기회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거짓이 진실을 이기고 불의가 정의를 누를 때, 사회적 정의는 고갈되며 불공정한 사회로 퇴보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재판이 ‘거짓재판’이 된다면 위증보다 더욱 참혹한 결과에 이를 것이다. 재판장이 자기 양심을 속이고 진실에 눈을 가린 재판을 한다면 법원에 대한 신뢰는 더욱 추락할 수밖에 없다. 기존 사회이론과 내용이 다른 ‘사회계약론’과 ‘에밀’을 집필해 재판에 회부된 루소가 가장 증오한 것도 맨 끝의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낳은 5명의 자녀를 고아원에 보내고도 이를 숨겼는지 루소에게 물어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사뭇 궁금해진다.

 

 

/박상흠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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