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제네바에서 국제인도법 준수 강화에 관한 제5차 정부 간 절차가 진행됐다. 세계 곳곳에서 빈발하는 무력분쟁에서 국제인도법이 준수될 수 있도록 국가 간 논의의 장을 만들자는 취지로 지난 8년 동안 진행돼 온 협상은 이 회의에서 국가 간 견해 대립으로 인해 결렬되고 말았다. 지난 2년간 국제인도법을 공부하면서, 타국의 입장을 파악하고 우리 입장을 정립하기 위해 고민했던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비록 전쟁의 본질이 살상과 파괴에 있다고 하더라도, 국제인도법은 비정한 전쟁의 현실에서조차 인간성을 보호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만들어졌다. 1949년 4개 제네바협약과 1977년 2개의 추가 의정서가 체결됐으며, 196개 국가가 제네바협약에 가입했다. 국제인도법은 전투원 중 부상자, 병자, 포로 등 보호, 전시 민간인 보호, 민간인 피해 및 불필요한 살상과 파괴를 줄이기 위한 전투방법과 무기의 제약 등을 다루며,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은 주요한 국제인도법 위반을 전쟁범죄로 규정했다. 그러나 광범위하게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 규범들이 현실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것 같지는 않다. 국제인도법이 없었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전쟁의 참상이 매일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전쟁범죄가 처벌에 이르는 경우도 드물다. 국가 간 전쟁이 위주인 국제인도법 초창기와 달리 오늘날 전쟁은 비국가무장단체나 테러단체와의 무력분쟁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사이버전쟁과 같은 새로운 현상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국제인도법은 이를 충분히 따라잡지 못한다.

국제적십자총회는 이런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국제인도법 준수강화를 위한 메커니즘과 비국제적 무력분쟁에서 피구금자 보호라는 주제에 관해 2개 정부 간 협의체를 발족했다. 그러나 이는 2017년 5월, 3일간의 회의에서 끝내 결렬됐고, 그나마 5차까지 진행된 국제인도법 준수강화 협의도 지난 12월 결렬되고 말았다.

문제는 뿌리 깊은 불신이다. 분쟁상황에 노출돼 있으며 질서 유지를 위한 충분한 자원을 보유하지 못한 국가들은 안전하고 부유한 국가들이 국제인도법을 내세워 주권을 침해하고 간섭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안전한 국가들이 전쟁 상황에 처해있는 국가의 특수성과 어려움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결국은 국제인도법을 이용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는 불신이 해소되지 못한 것이다. 누구도 국제인도법의 고귀한 명분과 국가주권의 신성함을 노골적으로 부정하지 못하니, 협상장은 늘 애매하고 모호한 말들이 넘치기 마련이다.

국제인권, 국제인도법 분야에선 이러한 인권과 국가주권의 대립, 보편성과 특수성의 대립을 늘 목도하게 된다. 지난 100년을 돌이켜 우리가 어디로부터 여기까지 왔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답보 상태에서도 인간성에 대한 희망이 헤겔의 ‘이성의 간계’처럼 흘러가고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창온 주제네바대표부 법무참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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