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의 제목은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제목을 빌려왔음을 미리 밝힌다.

나는 지난해 9월 출산 이후 일에 있어서는 ‘멈춤’ 상태다. 물론 고된 육아노동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육아로 인해 그동안 얼마나 편협하게 세상을 살아왔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늘 의뢰인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를 키우다보니 당시 이해하기 어려웠던 주장들이 이제야 이해를 넘어 절절하게 공감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 5~6개월의 어린 딸을 둔 여성 의뢰인이 이혼소송에서 양육권을 주장하는 사건을 맡게 됐다. 상대방의 경제력이나 모든 여건이 우리 의뢰인보다 월등해 자녀의 복리를 위해서는 아버지가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온당해 보이고(물론 결과는 우리 의뢰인이 양육권을 득하게 됐지만) 의뢰인은 거주가 안정돼 있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혼인시기도 짧아 재산분할으로 받을 돈도 적은 상황. 당시 나는 속으로 ‘진정 자신의 딸을 위하는 것이 뭔지 모르고 욕심을 부리는 건가? 남편에 대한 증오심이 이런 주장을 만들었나?’라고 생각하며 마른 나뭇가지처럼 사건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만 4개월의 딸을 키우다보니 그녀가 자꾸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돼 버렸다. 먹이고 입히고 무엇보다 잠드는 것까지 아이가 어릴수록 엄마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수유텀과 수면텀을 지키면서 아이를 면밀히 관찰해온 엄마보다 더 좋은 양육자는 없고, 아이 역시 밤잠은 엄마하고만 자려고 하니(이건 내 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아이에게 엄마는 세상 전부 그 자체다. 다른 여러 조건보다 ‘엄마’라는 조건이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월등함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깨달음과 동시에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목 끝까지 빨개지도록 올라왔다.

한편, 2017년에는 소년범을 보조하며 소년범의 아버지로부터 “이런 자식이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방법이 없겠느냐. 포기하고 싶을 때는 한 순간도 없다. 제발 선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부모가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왜 본인 자식의 잘못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없이 자식이 소중하단 이야기만 하는지, 나 같으면 저런 자식은 없는 게 나을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출산 후에 보니 부모는 어떤 자식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그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자식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본능이고, 그 본능을 누르고 상대 아이를 먼저 배려하는 일, 그를 먼저 살피는 일은 당연한 것이 아닌 특별한 수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내 딸은 이제 막 121일이 지난 만 4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만난 지 4개월 된 아이에게 이토록 놀라운 감정이 생긴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애정을 가지고 보니 울음도, 투정도 이해하고 감싸 안게 된다.

나는 그동안 이 직업을 천직이라고 생각하며 나를 키운 8할이 책임감이라고 자만하고 있었다. 책임감은 내가 상대에게 가진 최소한의 예의와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그 일을 나는 어떤 모습으로 마주하고 있었나. 돌이켜보게 된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당연함을 넘어 의뢰인의 울음과 투정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감싸안고 있었는지 자문하니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에 스스로가 너무나도 작아진다. 이래서 사람은 가끔 멈춰서기도 해 보아야 하나보다.

 

 

/임수연 변호사·경기중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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