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했던 키루스 대제의 이력은 화려하고 길다. 그의 정복과 치세술은 다리우스, 알렉산더와 같은 후대 군주의 모범이 되었고, 심지어 미국의 국부 토머스 제퍼슨도 그의 전기를 간직했다고 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는 재발견된다. 위대했던 이란문명 재건과 글로벌 파워로의 도약을 추구했던 팔라비 2세는 1971년 그를 이란의 국부로 삼고 그 적통이 자신임을 주장했다.

또한 팔라비 왕은 아예 대제를 세계인권의 아버지로 격상시켰다. 기원전 539년 바빌론을 점령한 키루스 대제는 유대인 노예를 해방시켰으며, 피정복민의 신에게도 경배했다. 이는 다양한 민족과 방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실용적 통치술이었다. 하지만 키루스 대제는 인권의 선구자로 묘사되었고, 그 치적을 담은 기록인 ‘키루스의 원통’도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으로 포장되었다(팔라비 왕의 기증으로 그 모조품은 현재까지도 유엔본부에 전시되고 있다).

설령 이것이 정치가의 몰역사적 선전일지언정, 이 시절에 이란 여성과 소수 종파 권익이 향상되고, 인권의식도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2003년 무슬림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시린 에바디의 수상소감은 이를 방증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키루스 대제의 후손이라 하면서 인권의 선구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란에서 키루스 대제는 금지어에 가깝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은 엄격한 종교국가가 되었고, 세속적 역사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이란의 인권상황 역시 악화되어 갔다. 경찰국가에서 언론과 집회결사, 표현의 자유는 제한되며, 여성과 청년들은 전근대적 재판과 처벌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늘날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이란은 북한, 미얀마, 에리트레아 등 심각한 인권위반국가와 함께 다뤄지고 있다.

다만 이란인들은 대제의 기념일을 잊지 않았다. 매년 10월 29일 사람들은 그의 영묘로 향했지만, 정부는 이를 막아 왔다. 고의로 도로를 막고, 주민들에게는 협박문자를 보냈다. 실제 지난 2016년 집회에서는 300여 명이 연행되고 70명이 구속되었다. 국부로 추앙받던 대제는 고향에서 이렇게 씁쓸한 대접을 받고 있다.

한편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그의 치적을 재조명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다. 지난 3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선언에 대해, 이스라엘 총리는 이를 유대인에게 자유를 주고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허락했던 키루스 대제의 업적에 비유했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키루스와 트럼프는 여호와의 대리인으로 동일시되었고, 둘을 함께 새긴 동전도 만들어졌다.

국제사회는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인 금년을 기념하고 있지만, 한때 인권의 아버지로 추앙받던 키루스 대제는 팔레스타인인의 인권을 짓밟아 온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적 우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의 부침은 인권과 정치권력의 불안정한 동반 관계를 잘 말해주는 것 같아 아쉬움을 남긴다.

 

 

/윤상욱 주제네바 대표부 인권참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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