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전원합의체 판결에 담겨진 정치한 이론 전개와 치열한 법리 공방을 보면서 과연 최고 법원의 판결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나름대로 생각해 온 바가 없지 않아 감히 몇자 적어보고자 합니다. 빈약한 내용이라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주변을 의식해 혼자의 생각만으로 그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또한 30년이 넘는 기간 법조계에 몸담아 온 사람으로서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기로 했습니다.

 

Ⅱ. 저는 기본적으로는 대법원 판결의 결론에 찬성합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적 지배의 희생물이 되어 열악한 환경 하에서 견디기 힘든 노역을 강요당하고서도 합당한 대가도 받지 못한 피해는 당연히 배상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본국의 불법적인 침탈을 원인으로 하는 위자료 청구권 이외의 다른 개인적 청구권에 관한 대법원의 견해에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소급입법에 의하여 재산권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현 대한민국 헌법 제13조 제2항의 내용으로, 1962년 12월 26일 5차 헌법 개정 시 처음 등장한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 박탈 금지 조항입니다. 형벌불소급과는 달리 이를 헌법에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는 예는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모든 개인에 대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특히 개인의 생명·자유·재산에 대하여 신성불가침적인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는 근대법에 있어서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 박탈의 금지는 기본적인 법원리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불가침적으로 존중받는 개인의 재산권이 국가 사이의 합의에 의하여 함부로 침해될 수 있는 것인가-제가 아쉽다고 한 대법원의 견해란 바로 이에 관한 것으로, 대법관 다수의 의견은 이 사건 위자료 청구권 이외의 대한민국 국민의 대일 개인적 청구권(이하 ‘개인청구권’)은 한일 간 청구권협정(이하 ‘한일협정’)에 의하여 소멸됐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법체계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일부 국제조약의 경우를 제외하고, 조약의 효력에 대하여 국내법보다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는 예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헌법 역시 제6조 제1항에서 “헌법에 의하여 체결·공포된 조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청구를 인용하는 주된 근거로서 “일본국의 불법적인 침탈을 원인으로 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개인적 위자료 청구권은 한일협정의 적용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는바, 이는 결국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짐에 불과한 한일협정에 의하여 대한민국 국민의 개인청구권이 위자료 청구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멸됐다고 보는 것입니다.

Ⅲ. 한일협정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의 기본틀을 제공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근거를 두는 것이기는 하나, 일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의해 빚어진 한반도에 대한 강점과 불법적 지배에 따른 양국 사이의 불행한 역사를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해 맺어진 합의가 바로 한일협정입니다.

이러한 한일협정은 마땅히 피해자인 대한민국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침해하는 내용은 결코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이 그 본질적 한계로 설정되어야 합니다. 순수한 법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법률로서의 지위를 갖는 국가 간의 합의에 의하여 헌법적 가치를 인정받는 국민의 기본적 권리가 침해될 수는 없는 것인데, 더구나 협정 당사국 모두가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 박탈 금지를 기본적인 법원리로 채택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임을 표방하고 있는 터에, 그들 사이의 합의에 의하여 협정 당사국 국민, 특히 피해자인 대한민국 국민들이 과거 일제 강점기에 실효적으로 적용됐던 법체계하에서 인정받은 정당한 재산권이 소급적으로 부정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일제 강점기 당시의 우리 동포를 대한민국 국민으로 보아야 하는지, 대한민국과 일본국 사이의 협정이 대한민국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우리 동포들에게도 효력을 미칠 수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하여도 검토가 필요하겠으나 이 글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런데 한일협정 정도 조약으로 이러한 대한민국 국민의 개인청구권이 원칙적으로 소멸됐다고 그렇게 쉽게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까? 저의 법률적 수준이 너무 낮은 탓인지 모르겠으나 저로서는 대법원이 어떻게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됐는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번 대법원 판결의 기초라 할 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68620 판결이 “위 원고들의 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그 개인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는 없고…·”라고 했음에도 말입니다.

대법원이 혹시 국가 간의 조약에 의하여 국민들의 재산이나 이익에 관한 사항을 일괄적으로 해결하는 이른바 ‘일괄처리협정(lump sum agreements)’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한 것이 아닐까 짐작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괄처리협정은 해당 조약에 그러한 부분에 관한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적법·타당하고 합리적이며 수긍할 만한 기초에 입각한 합의일 때에 비로소 당사국의 국내법 체계에 수용될 수 있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일제 강점기에 성립된 대한민국 국민의 대일 개인청구권들의-일본국의 주도로 이뤄진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건 당시 적용되던 법질서에 따른 일반적인 개인청구권이건을 불문하고-소급적 박탈을 용인케 할 정도의 그 어떠한 이유나 근거라는 것이 도대체 가능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설사 한일협정이 일괄처리협정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또한 일제 강점기에 발생한 대한민국 국민의 대일 개인청구권 모두를 적용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개인청구권들은 결코 한일협정이라는 것에 의해 소급적으로 박탈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할 것입니다.

 

Ⅳ. 한일협정에 의해 대한민국 국민의 개인청구권이 부정될 수 없는 것이라면, 한일협정의 내용 중 대한민국 국민의 개인청구권에 관한 부분은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인가가 문제로 대두될 것입니다. 조약은 설사 그 내용에 불완전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가급적 그 효력이 인정될 수 있는 방향으로 해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한일협정의 내용 중 대한민국 국민의 개인청구권에 관한 부분을 해석한다면, 대한민국 국민의 개인청구권 자체는 한일협정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대한민국 국민은 일반적인 법리에 따라 일본국이나 국민 내지 기업에 대하여 자신의 개인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대한민국은 일본국이나 국민 내지 기업에 대하여 그들의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책임을 대신 이행하거나 이행으로 인한 비용을 보전해 줄 의무를 부담한다는 취지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일본국이나 국민 내지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고, 소송의 결과에 따라 그들의 재산에 대하여 집행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집행과 관련하여서는, 집행단계 이전에 대한민국이 그들의 책임을 대신 이행한다거나 혹은 집행 이후 그들에게 집행을 당한 액수 상당을 보전해 주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다만 전원합의체 판결과 같이 위자료 청구권의 경우 한일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대한민국이 그 책임을 대신 이행하거나 비용을 보전해 줄 근거도 없는 것 아닌가 하는 문제가 이론상 있을 수 있습니다). 한일협정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국민의 재산권 보장이라는 자유민주주의 법체계의 기본원칙을 해하지 않으면서 한일협정의 기본적인 취지를 실현할 수 있는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국의 강제적 점령 기간 중에 형성된 법률관계를 왜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이 대신하여 해결해 주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나 반발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국가 간의 합의는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 문명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태도일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 정부로부터 3억 달러의 무상 제공과 2억 달러의 차관을 받기로 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국이나 국민 내지 기업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약속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한민국 국민에 대하여 일체 효력을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한일협정의 정신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국이나 국민 내지 기업을 상대로 책임의 이행을 구하는 경우 이를 해결해 주기로 약속을 한 것으로는 보아야 할 것이고, 그러한 해석에 따라 처신을 하는 것이 자신의 국민을 위함과 동시에 상대국에 대한 약속도 이행함으로써 문명국가로서의 국격을 지키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Ⅴ.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는 한일협정에 의해 함부로 부정될 수 있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국가 간의 약속 또한 존중되어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함과 아울러 일본국에 대하여 대한민국의 국격을 보여주는 방법을 나름대로 모색해 보았습니다. 많은 질책을 부탁드리며 부족한 글을 마치겠습니다.

 

 

/박동영 변호사(서울회·법무법인 두우)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