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동력은 순전히 ‘국민’에게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의혹이 처음 제기된 순간부터 탄핵안이 통과될 때까지 기자는 국회 취재 현장에 있었다. 탄핵을 주도했던 더불어민주당과 당시 국민의당, 정의당조차 초반에는 ‘탄핵’을 입에 담지 않았다. ‘퇴진’이 구호의 전부였다. 기자를 만난 주요 인사는 “국민의 반 발짝 뒤를 따라가는 게 낫다”고 말했고 신중을 기한다는 이유로-하지만 사실은 역풍을 맞을까봐-늦게 쫓아가길 택했다. 시민들은 매주 토요일 그 추운 광화문 광장에 모였고, 집회 인원을 보고나서야 야당은 탄핵을 거론했다. 새누리당도 분열하기 시작했다. 국회 가결의 동력이었다.

법관 탄핵이 거론되는 이 시점에도 기자는 국회를 출입하고 있다. 국회의 법관 탄핵 소추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언론은 탄핵안을 가결하려면 과반의 표를 확보해야 한다는 점을 과제로 꼽는다. 하지만 ‘정치인의 셈법’ 또한 변수다. 보수야권의 일부라도 호응을 얻지 못한 채 가결한다면 법적 요건으론 문제가 없지만 정치적 후폭풍을 감당해야 한다. 혹시라도 법원 심판 단계에서 탄핵이 고꾸라지면 책임은 한쪽 진영이 져야 하고, 과정과 결과에 있어 생길 피로감은 국민의 몫으로 돌아간다. 이는 큰 부담이다. 여권이 ‘법관 탄핵’이란 법원 안팎의 요구를 받겠다고 신호탄을 쏘아 올리고도, 선뜻 속도를 빠르게 내지 못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재판거래 의혹 법관들에 대한 탄핵이 이대로 무산돼도 될 것인가. 법조계가 인지해야 할 무서운 사실이 있다. 정치권에서도 법관 탄핵 자체를 반대한다고 대외적으로 말하는 이는 없다는 점이다. 탄핵 반대 입장으로 알려진 자유한국당 소속 여상규 법사위원장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본인의 소신이 왜곡돼 알려진 것 같다며 시기상조라고 생각할 뿐이라고 입장을 정정했다. 여야가 찬반으로 나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증거와 정황이 차고 넘치는 것이다. 현재로선 탄핵 판사 선정이 쉽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민사소송과 달리 형사소송의 공소장은 무게감이 남다르고, 구속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소장에는 이미 법관들의 재판개입 행태가 적나라하게 적시됐다. 탄핵 대상을 최소화한다면 오류의 가능성은 큰 폭으로 줄일 수 있다.

용감한 과거 법관들을 떠올려본다. 1946년 김용무 대법원장이 담당 민사사건을 잘 봐달라고 쪽지를 보내자, 직권으로 김 대법원장을 증인으로 채택해버린 오승근 부장. 1971년 검찰과 다른 의견을 내는 법관들이 신원조사에 도청까지 되면서 사법권이 침해되자 항의성 사표를 제출한 153명의 판사들(당시 전국 법관의 1/3). 법관 탄핵이 대두되는 지금도, 전국법관대표회의뿐 아니라 법원 내부에서 자성과 폭로의 목소리가 나와야 할 때다. 공을 넘겨받은 국회가 실제로 탄핵을 해낼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고통스럽지만, 이것이 국민 앞에서 유일하게 사법부가 신뢰받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김문영 MBN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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