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구테레쉬 유엔 사무총장이 군축 분야의 야심찬 구상을 제시했다. 지난 5월 제네바 대학에서 군축 의제를 발표한 데 이어 이달 초에는 이 의제 이행을 위한 세부계획을 인터넷에 공개한 것이다. 이 의제와 계획을 살펴보면 가히 군축 종합선물세트라 할 만 하다. 거의 모든 군축 분야를 망라하고 있는데다가, 필요조치와 활동계획은 물론 이행상황평가와 담당자도 밝히고 있어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상당한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인류를 구하는 군축’ 장(章)은 핵·생화학무기 등 대량파괴무기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생명을 구하는 군축’ 장은 재래식 무기가 초래하는 인도주의적 영향을, ‘미래 세대를 위한 군축’ 장은 신무기와 사이버 안보 문제를 각각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군축 파트너십 강화’ 장은 정부를 넘어 연구기관, 여성, 청년, 시민사회 등이 군축을 위해 협력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이 이 의제를 하필 제네바에서 발표한 것은 여기 위치한 군축회의(Conference on Disarmament)가 유일한 다자군축협상체로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현실과 관련이 깊다. 우선 이 회의체는 주권평등원칙에 따라 사실상 만장일치제로 운영되고 있기에 65개 회원국 각각이 다 거부권을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국가별로 이해관계가 다른 상황에서 군축은 국가의 존망을 가르는 안보와 직결되는 만큼 특정 분야를 선택해 여기에 집중하기로 합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이에 따라 군축 회의는 ‘포괄적이고 균형 잡힌’ 접근법을 취하고 있는데, 쉽게 말하자면 모든 걸 한꺼번에 다뤄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접근법이 자칫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으로 귀결되기 쉽다는 것이다. 실제로 1978년 창설된 군축회의는 1996년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 성안 이후 지난 20여년간 아무런 가시적 성과를 도출하고 있지 못하다.

한편, 작년에 전 세계 군비 지출은 1조7천억 달러를 기록했는데, 이는 세계 곳곳에 필요한 인도지원액의 80배에 달하는 금액이라고 한다. 인류와 생명 그리고 미래세대를 살릴 수 있는 막대한 돈이 무기 개발과 구매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보다 못한 유엔 사무총장이 국가들에게만 군축을 맡겨둘 수 없어 군축 의제와 이행계획을 이번에 제시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국가들의 반응은 역시 제각각이다. 일부 군사강국은 탐탁지 않은 듯 그저 구테레쉬 사무총장 개인의 구상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 한다. 하지만 많은 국가들은 교착되어 있는 군축 대화와 협상을 재활성화 하는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하며 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군축 의제와 이행계획 역시 어떤 우선순위를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결국 국가들이 자신의 입장에 부합하는 요소만을 강조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 이를 해석하는데, 아전인수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유엔 사무총장이 야심차게 내놓은 이 군축 의제와 이행계획은 멈춰선 군축 펌프를 다시 작동시킬 소중한 마중물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저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자기 밭에다 끌어다 쓰는 물로 그칠 것인가? 그 어떤 경우가 되었든 우리로서는 꽤 유용한 구상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어떤 분야에서 협력하고 또 어떻게 활용할지 이제 우리 나름의 의제와 계획을 세울 시점이다.

 

/최원석 주제네바대표부 참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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