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대한민국에서 법조인은 기득권의 상징이었다.

법비(法匪)들은 법보다 가까운 각종 폭력이 지배했던 군사정권의 시대에 최고 권력자를 시중들었고, 폭력의 시대가 끝난 이후엔 칼보다 강한 펜으로써 권력의 흐름에 일찌감치 편승하여 권력에 가까이 다가섰다. 그런 부정한 일부는 없는 셈 치더라도 나머지 선량한 법조인들 역시 대개 고소득자였다.

초기 사법시험은 아주 적은 숫자만을 합격시키는 시험이었으므로 그 소수의 전문직 엘리트들이 상위 소득 집단이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며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러니 개천에서 났든 구름에서 났든 사법시험 합격자들은 ‘용’이었고, 소위 ‘사’자 직업을 이야기할 때 의사와 함께 선두에서 언급되는 것은 법조삼륜이었다.

이후 법조인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로스쿨 도입이 확정되기 전까지 사법시험은 합격자를 늘리는 방향으로만 변화했으며, 로스쿨은 사법시험 합격자가 가장 많았던 1000명 시절보다도 약 500명을 추가로 합격시킨다. 은퇴할 나이대의 법조인들은 선발인원이 적던 때에 사법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은퇴한다 해도 당연히 새로 합격하는 숫자만큼 줄어들지 않는다. 더구나 변호사는 연령 제한도 없다.

진입자는 늘어나는데 과거의 영광을 유지하려는 것은 그저 미련일 뿐이다. 만일 법조시장이 커진다면 진입자 확대를 상쇄할 수도 있겠으나 합계출산율이 영점대에 다다른 요즘에 와선 큰 기대를 하긴 힘들어 보인다. 21세기의 법조인은 예전 같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기득권이 되는 시대는 끝났다. 법조인은 이제 용이 아니다.

그러나 왜 용이어야 하는가?

법조인이 지난 세기에 누린 것들은 국가가 변호사를 적게 뽑았기 때문에 얻은 그야말로 반사적 이익일 뿐이다. 그들이 누린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반대로 법조인이 기득권이어야 할 당위나 필요도 없다. 변호사가 상인과 구별되는 어떤 고귀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면 자격증을 딴 것만으로 쉽사리 기득계층이 될 수 없다고 하여 그 가치가 바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변호사 수의 증대는 변호사들끼리의 경쟁을 심화시키겠지만 법률서비스의 소비자는 혜택을 볼 것이다. 더 많은 법조인이 배출되는데 의의가 있다면 그것은 법조인의 능력과 재능이 더 아래까지 더 자주 닿는 것에 있을 것이다. 법이 기득권만을 위해 쓰이지 않는 곳에 있을 것이다. 용이 아니라고 모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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