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아시아의 주요 대학들이 아시아법학원(Asia Law Institute, 이하 ‘ASLI’)이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서구가 아닌 아시아의 시각으로 아시아의 법 현상을 연구하고 연구자들 간의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자는 취지였다. 현재 서울대, 도쿄대, 베이징대, 싱가포르대, 홍콩대, 타이완대, 인디아국립대, 인도네시아대, 필리핀대 등 16개 대학이 ‘창립멤버(founding member)’로 참여하고 있다. 회원기관은 100개가 넘는다.

그 열다섯 번째 학술대회가 ‘미래를 향한 법’이라는 대주제로 5월 중순 서울대에서 열렸다. 33개국에서 300여명의 법학자가 참여하여 200건이 넘는 학술발표가 이어지는 ASLI 사상 최대의 행사였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참석자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학문적 열기가 대단했다. 세미나실 안팎에서 치열한 토론과 유쾌한 대화가 이어졌다. 자국의 좋은 점을 뽐내기도 하고, 타국의 경험을 묻고 배우기도 했다.

개회식과 만찬행사 등의 연사로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판소장님, 권오곤 전 유고전범재판소 부소장님, 권순일 대법관님, 강일원 헌법재판관님을 모셨다. 이분들의 유창한 영어 연설은 서로 다르면서도 공통분모가 있었으니, 법치주의, 민주주의, 인권이 국제질서의 근본이 되어야 하고 여기에 법률가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창설을 제안하기도 하고, 전쟁범죄에 대한 법률가들의 적극적 관심을 주문하기도 했다.

나이 지긋한 엘리트 법조인들이 열정적으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얘기하고, 더구나 국제적 시각에서 조망하는 데 대해 여러 나라의 법학자들이 진심으로 놀라고 부러워했다. 자기 나라의 원로 법조인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진취적인 모습이라고 했다. 역동적인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선망이 이런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낸 것 같다. 탄핵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헌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정권교체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을 이번에 서울에 오니 알 것 같다고도 했다.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니 한국이 아시아 내에서 법치주의의 정착을 위해 상당한 지적, 실천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강대국인 중국이나 일본이 무엇을 한다고 나선다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의심 받기 쉬울 것이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나라, 입헌주의와 민주주의를 경험으로 얘기할 수 있는 나라, 그러면서 꼼꼼하게 일처리를 잘 해낼 수 있는 나라, 그것이 한국의 이미지인 듯했다. 그래서인지 한 세션에서 발표자로 나선 한국의 젊은 판사님이 아시아 특허재판소의 설립을 주장하자 큰 관심을 얻기도 했다. 자원봉사에 나선 학생들도 완벽한 영어와 세련된 매너로 손님들을 능숙하게 안내했고, 로스쿨로 전환하면서 갖춘 시설 환경도 찬사를 받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변시와 성적 부담에 짓눌린 로스쿨생들이 별로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외국에서는 학생들이 방청석에 많이 앉아 있곤 했는데, 우리 로스쿨생들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봉사자도 주로 로스쿨에 관심이 있는 학부생들이었다. 마치 수험생 있는 집에서 “공부 방해해서 미안하다”며 어른들끼리 제사를 지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학생들이 눈앞의 공부를 위해 더 큰 견문의 기회를 놓치는 것 같아 안타까웠고, 과연 무엇이 학생들의 진정한 실력을 길러주는 길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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