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가 판문점에 울려 퍼졌다. 이 곡은 1994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표했고 2002년부터 교과서에 수록되었다고 한다. 교과서에 실릴 정도의 곡이라면 세상에 던지는 울림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스무살 서태지는 한민족인 형제가 서로 겨누는 것을 멈추고 마음의 문을 열어 같이 나아갈 길을 찾자고 일갈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2000년이 시작되면서 ‘발해를 꿈꾸며’가 던진 희망과 화합의 메시지는 한반도 전체로 퍼져나갔다. 당시, 남북한 화해 분위기 속에서 금강산관광이 열렸고, 2003년 인천지방변호사회에서 가을 야유회로 금강산 관광을 추진하였다. 그때 나도 금강산을 다녀왔다. 가을햇살이 내리쬐는 늦가을 우리 일행은 강원도 고성 남측 출입국관리소에 도착해서 북한입국허가서를 교부받았다. 북한출입국관리소의 입국심사를 통과한 후, 대기하고 있던 번호판 없는 버스를 타고 장전항 금강산호텔에 도착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가을햇살은 따뜻했지만, 내 눈에 들어온 북한 농촌풍경은 1970년대 우리 농촌과 비슷했고 그 마을들은 분단의 세월만큼 저 멀리 자리하고 있었다. 세종대왕이 온천욕을 즐겼다는 온정리 온천에서 바라본 금강산 비로봉, 정철의 관동팔경 중 하나인 삼일포의 잔잔한 물결, 개골산 명칭에 걸맞게 산등성이를 베개 삼아 일렬로 드러누운 바위들,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하였다는 상팔담, 10년이 지난 지금도 하늘 아래 금강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2007년에 다시 한번 금강산을 갔지만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북한 주민들이 사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등산코스를 안내하는 안내원, 금강산호텔에서 서빙하는 종업원이 있었으나 우리는 그들과 변변한 대화 한번 나누지 못하고 서로를 영혼 없이 웃는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숙소에서 본 금강산 야경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멀리 어둠의 지평선 끝에 별빛인지 전깃불인지 분간할 수 없는 희미한 불빛만이 깜빡거렸다.

이제 그 희미한 불빛이 어쩌면 남북화합의 불씨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4월 27일 남북정상이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을 계기로 남북이 저 금강산 옥류동 계곡만큼 깊어진 불신의 골짜기를 메우는 날을 기대해 본다.

변호사를 하면서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는 상대방에게 마음껏 주는 것이다. 박경리가 토지에서 “심장을 쪼갤 수만 있다면 그 가냘픈 벌레에게도 주고 싶고, 공작새 같고 연꽃 같은 서희에게도 주고, 이 만주벌판에 누더기 같이 찾아온 내 겨레에게도 주고 싶다”라고 말한 것처럼, 다른 하나는 마음의 성역을 침범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장영희 교수는 ‘문학의 숲을 걷다’에서 남의 마음의 성역을 침범하는 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라고 했다. 마음의 성역이 무엇일까? 사람에게 존재하는 최소한이라도 침범할 수 없는 존귀함이다. 대화하며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서로 존중하면서 마음껏 주는 것이야말로 상대의 마음을 얻는 지름길이다. 이제, 남과 북이 그런 마음으로 대화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졌으면 한다. 스무살 청년 서태지가 세상을 향하여 외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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