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려면 매우 괴이하게 된다. 깨달음은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 자리를 보는 것이니, 그러하다.

말과 글은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정작 생각 이전의 본질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인류 역사를 보면 끊임없이 깨달음을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다양한 철학적, 종교적인 말과 글이 나오게 되었다.

여기서는 너무 무겁지 않게 깨달음을 이야기해보자. 즐거운 마음으로 말이다. 아주 재미나는 현상은 주로 불교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다른 종교라고 하여 깨달음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부처는 똥 막대기다, 뜰 앞의 나무다, 밤중에 도둑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간다” 등등 아주 재미있는 말이 튀어나온다. 기도나 참선을 하면서 깨달으라고 선지식이 내뱉는 소리다.

위 소리들을 생각으로 헤아리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위 소리들이 달을 보라고 내뱉는 소리인데, 사람이 자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니, 납득될 리 없다.

요새 유튜브에 올려진 영상물에도 보면, 본질의 깨달음을 전하려는 영상물이 많이 나오는데, 참으로 그 정성이 갸륵하다.

사람의 각성 상태는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상태에서 본질을 보지 못하는 소경을 스스로 돌이켜 깨닫게 만들려니 그 전달자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수많은 경전들을 읽어 보아도, 그것은 끝내 글에 그치는 것이고, 영상물을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끝내 매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경전이나 영상물에 담긴 내용을 보긴 보되, 그에 감추어진 본질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웃거나 울고 있을 때,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있을 때, 불현듯 그 너머로 나타나는 게 있다. 그냥 쉽게 나타난다.

허나 이를 글로나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영성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그래도 추측 가능하다. 깨달은 자들이 말하는 상태를 보면 모두 말이나 글로는 갈 수 없고 그것이 끊어진 상태임을 알아챌 것이다. 언어도단인 것이다.

그러나 그 언어도단의 자리에서는, 수만 가지 경전이 아주 쉽게 파악되고 모든 종교의 원리가 아주 쉽게 파악된다. 깨어 닿은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는 만물과 만상이 그냥 있을 뿐인데, 이를 복잡 다양하게 표현한 것이 두꺼운 경전의 내용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도, 읽고 있는 상태에서 돌이켜 깨어나면 된다. 그러면 안도 밖도 아니요, 하나도 둘도 아니요, 너와 나도 아니요, 결국 말이 끊어지게 된다. 그러니, 내 말에도 속지 마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자리에는 먼지도 끼지 않아 닦아낼 것이 없다.

선지식들이 주로 쓰는 표현은 ‘청정, 적적, 뚜렷’이다. 필자는 천주교 신자인데, 성체 조배(일종의 묵상, 관상기도)를 하면 같은 상태가 드러난다. 성체 조배할 때 하느님이 모든 것을 맡기고 내려놓으라 하시므로 그에 순종하면 나는 순수히 그냥 있게 된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리 법조인도 잠시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하늘의 달을 보자. 잠시 지저귀는 새소리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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