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한해 내내 미루어 놓은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건강검진을 받는 도중 복부 초음파 검진를 하던 의사가 내 담낭에 돌(담석)이 가득하단다. 그 전에도 담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무심히 “네” 하고 넘어가려는데 초음파 화면을 주시하는 의사의 표정이 자못 심각하다. 의학적 정보에는 까막눈인 내게 직접 모니터 화면을 돌려서 보여주며 담낭의 모습과 상태를 설명해 주는데 담낭 전체가 하얗게 보일 정도로 담석이 가득 들어차 있다. 배 위로 초음파 기계를 돌리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의사에게 내가 던진 한 마디. “선생님, 그거 돌이 아니라 중학교 2학년 아들 키우다 생긴 사리에요.”

서른이 훨씬 넘은 나이에 결혼을 하였고 그 후로 어찌하다보니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것도 목메달이라는 아들 셋의 엄마가. 그러던 재작년, 큰아이가 중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러더니 처음에는 주에 1~2회 정도 부모 눈을 피해 몰래 피시방을 드나들더니 중학교 2학년이 되고 나서부터는 거의 매일, 그것도 모자라 주말에는 아예 아침부터 피시방에서 살기 시작했다. 일하는 엄마라는 핑계로 아이를 방치한 내 탓이라는 자책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아이의 공부습관을 잡아주어야 한다는 주변 엄마들의 처방에 따라 아이의 학원숙제를 챙겨보던 어느날 아이가 영어학원에서 내준 영어 독해 숙제를 한다며 글쎄 구글번역기를 돌리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며 “영어숙제를 구글번역기로 하다니 수학 문제를 답지 보고 푸는 것과 뭐가 달라, 당장 영어사전 가지고 와서 단어 찾아서 하지 못해!”라고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한 내 서슬에 놀란 아이가 영어사전을 가지고 오기는 했는데 이번에는 영어사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는 눈치이다. 영어유치원부터 치면 근 10년간 영어에 어마무시한 돈과 시간을 쏟아붓게 한 녀석이 태연히 구글번역기를 돌리는 것도 모자라 영어사전 사용하는 방법조차 모르는 상황을 보고 드디어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아이를 보니 ‘엄마가 저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보니 내가 뭔가를 잘못했나 본데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하고 얼떨떨해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아이를 보다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구글번역기조차 조만간 구닥다리로 만들, 타 언어간 의사소통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앱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될 아이에게 영어사전 찾아 억지로 영어단어를 외우게 한 후 그 단어를 가지고 해석 연습을 시키고 있는 나의 모습은 말 그대로 포크레인 옆에서 어떻게 하면 좀 더 빨리 삽질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지금 아이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순식간에 쓸모없게 될 파편적이고 구닥다리 지식이 아니라 시시각각 급변하는 세상에 순조롭게 적응하는 능력과 현명한 판단력,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배려와 공감능력이다. 지식과 재능은 차고 넘치나 자신의 권위와 힘으로 타인을 무시하고 굴복시킨 사람들이 상대방은 물론 우리 사회 전체에 얼마나 뼈아픈 상처를 주었는지 연일 터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김정은도 무서워한다는 중2병이니, 사춘기 깡패니 하며 아이의 성장과 변화를 두려워하지만 그것은 아이가 필요로 하는 애정을, 아이가 원하는 방법으로 주기보다 아이의 마음과 무관한 잔소리를 전처럼 편하게 하기 어려워졌다는 내 마음의 불평에 다름 아니다.

오늘도 피시방에서 죽치고 있는 중딩 아들에게 도 닦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OO야, 엄마가 너 좋아하는 삼겹살 김치찌개 끓여놨다. 얼른 와서 밥 먹자.”

담석, 아니 사리가 하나 더 쌓이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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