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 첫날, 교수님께서는 이러한 당부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답안을 작성할 때 글씨를 꼭 깔끔하게 쓰길 바랍니다. 본인의 글씨체에 자신이 없다면, 적어도 자음과 모음은 분리해서 쓰도록 하세요.”

150명 남짓 되는 학생들의 답안을 해독하셔야 하는 교수님의 애환이 절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새삼 제가 작성했던 답안들을 돌이켜보니 굉장히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현재 변호사 시험 및 학교 시험은 모두 수기로 작성해야 하고 쟁점보다 시간을 부족하게 제공해 변별력을 확보합니다. 따라서 지식만큼 빠르게 답안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글씨를 예쁘게 떼어 쓰면 시간이 훨씬 더 들 뿐만 아니라 손목에 무리가 더 갑니다.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은 흘려 쓴 답안을 채점자들께서 이해해주실 것이라 믿고 제출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글씨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고심하고 채점자들은 이를 해독하느라 고생하는 이런 상황. 고시서점에 ‘민법’과 ‘형법’ 옆에 ‘글씨체’라는 부문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손 글씨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예전에 ‘글씨체’를 한 과목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했다는 사법고시 합격생의 후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가 로스쿨 세대까지 이어진다는 것이 퍽 슬프게 느껴집니다. 학부과정과 사법고시 1차, 2차, 연수원의 과정을 3년으로 압축한 이 짧은 교육 기간에 글씨체를 위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또 써야 한다니요.

미국의 경제잡지인 포브스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한국의 인터넷 가구 보급률은 99.3%이고 ‘3살’ 이상의 인구 중 88.3%(약 4364만명)가 인터넷을 사용합니다. 이 수치를 미루어 보면 국민 대부분이 타자를 칠 수 있을 것이고, 타자로 답안을 작성하게 하는 것이 큰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특히 2011년 5월 2일, 전자소송이 가능하게 된 지 7년이 되었습니다. 소송 자료를 비롯하여 실무에서 거의 모든 법 문서가 컴퓨터로 작성된다는 점, 모든 사람이 동일한 가독성을 가진 답안을 작성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작성자 입장에서 답안 편집이 훨씬 더 용이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컴퓨터 시험이 수기식 시험보다 우월합니다. 토플 IBT를 비롯한 많은 시험이 컴퓨터로 진행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실행할 수 없는 일도 아닙니다. 일례로 저는 2016년 동경대 법대 여름 프로그램에서 기말고사 답안을 노트북으로 작성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변호사 시험을 비롯한 시험 답안을 손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 모래알과 같이 작은 불편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막을 여행하는 자가 느끼는 가장 큰 괴로움은 더위나 목마름이 아닌, 신발에 자꾸 들어가는 모래알이라고 합니다.

변호사가 되어가는 여정을 시작한 수험생들의 신발에서 이 모래알을 털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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