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8세, 인생의 황혼(黃昏)녘에 접어든 나이다. 오는 4월 1일이면 법조경력 50년을 헤아리게 된다. 긴 세월 같지만 지금까지 별로 이루어 놓은 것 없이 세월만 허송한 것 같아 아쉽고 착잡하기만 하다.

시인 김달진의 시(詩) 한 구절, “60세에는 해(年)마다 늙고, 70세에는 달(月)마다 늙고, 80세에는 날(日)마다 늙고, 100세에는 분(分)마다 늙는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덧없고 빠름을 절감한다.

울적한 심정을 달래 보려고 뜸했던 유달산을 다시 찾았다. 유선각에서 조각공원 입구까지 이어지는 오솔길. 늘 호젓하면서도 아늑하고 포근한 길이다. 상념에 잠기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우선, 지금까지 걸어온 내 인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정말 제대로 살아온 것일까? 나는 여지껏 내 가족만을 생각하고 내 잇속만을 챙기며 아등바등 앞만보고 달려왔다. 그렇다고 남은 것은 별로 없다. 남는 것은 자책과 회환 뿐이다. 어차피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인생이요,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인생인 것을….

그러나 베풀고 나누는 데는 꼭 물질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터득한 지혜와 경험을 바탕으로 몸으로라도 움직여서 삶의 밑바닥에서 무언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찾아 손발도 씻겨주고 눈물도 닦아주며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 한마디라도 들려주며 살아가고 싶다.

이제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마음을 확 비우라고 한다. 일응은 맞는 말이다. 걱정근심 한다고 꼬인 일이 제대로 풀릴 것도 아니고 뼈저린 후회를 되풀이 해본들 이미 잘못 살아버린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도 없다. 새삼 욕심을 부린다고 바라는 대로 이룰 수도 없다. 그런데도 말처럼 쉽지가 않다.

서산대사가 입적 직전에 읊었다는 해탈시(解脫詩) 한 구절, “내 인생 네 인생 사는 게 뭐 별거랍니까? 바람처럼 구름처럼 불고 흐르다 보면 때로는 멈출 때도 있는 법, 그냥 그렇게 사는 겁니다.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일어남이요, 죽음이란 그 구름이 스러짐이거늘” 이미 인생을 달관한 듯한 대사의 경지가 부럽기만 하다.

그렇다면, 범인(凡人)인 나는 얼마남지 않은 살 날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 잡다한 생각이 연이어 꼬리를 문다. 아무래도 주어진 현실, 있는 그대로의 처지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나머지 삶을 궁리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우선 감사한 일, 다행한 일부터 챙겨보자. 나이가 들수록 신체의 모든 조직과 기능은 쇠퇴하고 저하된다. 굳이 청구영언에 실린 탄로가(嘆老歌)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이는 자연의 섭리요 이치라고 순순히 받아들이자. 아직도 보고 듣는데는 큰 지장이 없고 보행에도 큰 불편 없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고희를 훨씬 넘긴 이 나이에도 여태까지 자식들한테 손 벌리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 할 수가 있는 일터가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다음은 늙어가면서도 누구에게나 짐이 되는 삶을 결코 살고 싶지 않다. 생을 마치는 그 날까지 제발 치매 걸리지 않고 잔병치레 덜하고 추한 모습 안 보이고 눈을 감으려면 건강관리에도 더욱 신경을 써야겠다.

연륜이 쌓여갈수록 사후세계를 자주 생각하게 되고 내 영혼의 본향을 그리게 된다. 영생복락을 누리든지 극락왕생을 하든지 내가 믿는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생활을 계속하면서 기왕이면 착실하게 사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사후세계를 대비하는 겸손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쯤해서 생각을 접고 소요정을 향했다. 벌써 해가 서녘으로 기울고 있었다. 내친 김에 서둘러 낙조대를 찾았다. 정자에 올라 검푸른 서해바다를 바라본다.

천사(1004)의 섬, 다도해의 관문, 크고 작은 섬들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예스런 돛단배는 간데없고 소형어선들도 이젠 모두 기계화 되어 제법 빠르게 움직인다. 육중한 화물선이 하얗게 물살을 가르며 다가온다. 입항을 알리는 듯 길게 여운을 남기며 기적을 울린다. 이윽고 시뻘건 태양이 서서히 사그라들면서 붉은 노을이 하늘과 바다를 장엄하게 물들인다.

곱게 물든 단풍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고 잘 마무리한 인생의 황혼이 어설픈 청춘보다 더욱 화려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인생 여정은 순간의 모음이다. 순간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가 모여 일생으로 이어진다. 오늘 하루를 내 삶의 마지막 날처럼 여기고 깊이 감사하며 알뜰하게 갈무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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