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전문대학원생의 필기구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형광펜, 볼펜, 그리고 연필. 일반적으로 형광펜, 볼펜, 연필순으로 텍스트의 중요도를 표시하는데, 마지막에 시험장에서 책을 볼 때 중요한 부분만 눈에 들어오길 바라는 이유일 것이다. 나의 기본서에도 판례는 형광색, 다수설은 볼펜, 이따금씩 기억할 만한 소수설은 연필로 줄이 그어져 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연필자국은 이내 희미하게 바라고, 결국은 형광펜 자국만이 남겨진다.

“판례의 다수의견만 암기하는 수험방식과 그것을 문제화한 선택형 시험에서 몇 문제 더 맞추었는지에 따라 변호사시험의 당락이 좌우되는게 과연 옳은 방법인지 모르겠다.”

얼마 전 교수님과의 식사자리에서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해보다는 암기에, 과정보다는 결과에 집중된 수험법학의 현실에 대하여 법학자로서 아쉬움을 토하는 말씀이었겠지만, 내게는 또 다른 의미로도 다가왔다. 더는 다수설과 소수설의 양분화된 관점이 통하지 않은 시대에서 다수를 위한 법을 찾기 위하여 때로는 소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며, 우리의 학습법은 그에 발맞추어 달라져야 하고, 다양성 속에서 성장한 우리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는 점 말이다.

실제로 어제의 소수의견이 오늘날의 다수의견, 아니 ‘다수’라는 표현을 지양하자면, 가장 합리적인 의견으로 자리 잡는 경우가 존재한다. 여성의 종중원자격 인정, 간통죄 위헌, 지목 변경 및 건축신고거부의 처분성 인정 등의 굵직굵직한 사건에서 소수의견과 다수의견이 뒤바뀌면서 판례가 변경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빈도수와 중요성는 현대사회의 변화와 발전이 진행됨에 따라 더욱 빈번해지고, 보다 중요해질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논리구성이나 합리성의 측면에서 다수의견보다 우월하다 평가받는 소수의견이 존재하고, 그와 같은 소수의견은 단순히 ‘소수’라는 이름을 걸고 있을 뿐, 결코 ‘다수’에 매몰되어서는 안 될, 존중 받아 마땅할 저마다의 관점이 주목받고 있다.

지난 11월 27일, 이진성 헌법재판소장 역시 그의 취임사에서 “보다 과감히 선례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해 우리 앞에 놓인 헌법적 쟁점을 해결해야 한다”고 밝히며, 올바른 변화의 중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다수와 소수로 나뉜 양분법적 사고를 의심하는 데에서 출발해 다양한 관점과 접근법, 그리고 해결방안을 도출해 나가는 것이 미래 법조인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이자 역할일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법학전문대학원 교육제도와 법조인력양성 제도가 뿌리내리기를 바라본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