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공개된 사법부 블랙리스트 파장이 이어지고 있다. 법원행정처가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회의 의장 선출에 개입하고, 사법행정위원회 위원 후보자인 판사들 성향을 분석한 보고서 등 공개된 문건들은 충격적이었다. 이중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끈 문건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이었다. 문건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행정처는 2015년 1월 있었던 원 전 원장의 2심 판결 전후로 청와대와 각각 판결 예상·결과에 대해 대화했다. 2심 판결은 1심과 달리 원 전 원장의 대선 개입 혐의를 인정했다. ‘왕수석’으로 불렸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비서관은 행정처에 불만을 표했다. 행정처는 우 전 수석에게 ‘사법부의 진의’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무적 대응 방향으로 숙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설치’를 대법원 선고 전에 추진한다는 의견을 냈다. 즉, 원 전 원장 재판을 이용해 숙원사업을 해결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드러낸 것이다. 행정처 내부에선 정권의 약한 고리를 이용하겠다는 계산이 작용한 것이다.

원세훈 문건에 대한 파장은 컸고 언론들은 자연스레 전원합의체에서 만장일치로 파기환송 결정을 했던 2015년 7월 대법 판결로 시선이 갔다. 의혹보도가 나오자 대법관 13명은 “재판에 관해 사법부 내외부의 누구로부터 어떠한 연락도 받은 사실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며 보도에 깊은 유감을 표했다.

개인적으로도 대법관들이 판결에 있어서 외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실제 많은 판사들도 당시 대법원 판결에 대해 법리적으로 옳다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행정처 문건으로 대법 판결에 생채기가 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과정에 흠집이 있는데 무조건 결과를 신뢰하라고 할 수 없다. 외부적 요인의 개입을 극단적으로 배척해야 하는 재판이면 더욱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대법관들도 판결에 대한 의혹 제기에 앞서 의혹을 유발한 행정처를 엄하게 꾸짖었어야 했다.

더구나 원 전 원장 사건이 어떤 사건인가.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정권 보위를 위해 조직적으로 정치공작을 벌인 사건이다. 선거를 유린한 공작이었다. 행정처는 박근혜 정부가 정통성이 달려있다고 판단했던 점을 이용하려 했다. 민주주의 꽃을 짓밟은 정치공작 사건의 재판으로 청와대의 환심을 사려했다는 의혹이 들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 자체만으로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사법부의 신뢰가 추락했지만 아직도 책임감 없는 행태는 이어지고 있다. 파일 중 암호화된 760여개 파일은 당사자들의 비협조로 개봉조차 못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당시 사법행정 최고책임자들은 입을 굳게 닫고 있다. 암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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