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正義)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 말은 정의의 여신을 가리키는 디케(Dike)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리스 문헌에서 최초로 나오는 디케의 의미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처신하는 방식 내지 관습 또는 자연의 정상적인 진행 내지 추세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바른 길이라는 뜻이나 어떤 의무의 암시도 없었다고 한다. 정상적인 것, 즉 당연한 일로 생각되는 것이 디케였다. 이처럼 사건의 정상적 진행에서 기대 내지 예상되는 것이라는, 가치와 무관한 개념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향하여 어떤 사람에게 기대 내지 예상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 말할 때 비로소 의무나 규범을 창설하는 도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디케를 따르는 사람의 상태로서 명사 dikaiosyne, 즉 정의(justice)는 ‘제 자신의 할 일에 마음 씀’에 불과하다. 플라톤에게 정의란, 마땅히 자신의 것인 일을 하거나, 마땅히 자신의 것인 길(도리)을 따라 가되 다른 사람들의 길에 뛰어들어 그들의 일을 대신해서 해주려고 들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플라톤은 철저히 귀족 지배의 계급사회-박종현 선생은 최선자 정체(最善者 政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사람이 자신의 본연의 신분을 알고 그것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이런 식의 정의관이 생겨났을 것이다(이상 W.K.C.거스리·박종현 옮김, 희랍철학입문, 서광사, 2016, 18~20면 참조).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정의의 일반적 명제는 “각자에게 그의 것을”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이다. 신분이나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 점만 제하면, 플라톤의 정의 개념과 언어적으로는 거의 유사하다. 윌리엄 거스리(William Keith Chambers Guthrie)의 위 설명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사용하던 개념이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만, 정의의 본질을 사유하는 데에 몇 가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우선 자연의 정상적 진행 내지 추세를 뜻하는 디케의 개념에서,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가 자연질서 혹은-독일 법철학자들이 말하는-사물의 본성을 거스를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것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유전자 조작이 자유로워지고, 심지어 새로운 생명 창조를 곧 보게 될지도 모를 생명 공학 시대에,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정의의 준거점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되새겨 보아야 할 당연한 명제이다.

다음으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처신하는 방식 내지 관습이라는 디케의 의미는, 어떤 정의이든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뿌리내린 현실을 부정하고 흔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겸허한 생각과 만나게 된다. 실로 모든 정의는 시대의 아들이고, 동시대인들의 행동과 습관 속에 자리 잡아야 실현될 수 있는 무엇이다. 플라톤처럼 정의를 제 자신의 할 일에 마음 씀이라고 이해하는 순간 정의는 개인의 내면에도 스며든다. 그 결과, 플라톤 식으로 말하자면, 개인의 정의나 국가의 정의는 다르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귀족정이나 전체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식의 완전한 동일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국가가 실현하려는 정의가 개인의 신념과 행동, 관습 등에 스며들어 널리 동의와 지지를 받을 때 또는 동시대 개인들이 가장 많이 원하는 정의를 국가가 실현하려고 나설 때 통상 그 정의는 민주주의 원리에 부합한다는 당연한 의미 정도로 해석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언제나 최선일까. 개인과 국가의 ‘정의’가 강력하게 결합되었지만, 결국 그것이 민주주의의 부정이었고 부정의(不正義)였음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나치를 비롯한 여러 독재체제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정의의 형식을 넘어 정의의 내용 자체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 다시, 정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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