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제도에 익숙해지면 그것이 원래부터 당연하게 존재하여 온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지금은 모든 변호사들에게 익숙해진 변호인의 피의자신문참여는 어떨까? 대한민국 형사소송법이 제정된 후 피의자신문에 당연히 따르는 인권보장책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근거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수사실무에서 변호인의 피의자신문참여는 인정되지 않았다. 간혹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수사기관의 시혜적 조치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입법론으로는 변호인의 피의자신문참여권을 인정하여야 한다는 데에 견해가 일치하였지만, 해석론으로는 부정론과 긍정론이 대립하고 있었다. 헌법적 형사소송론에 기하여 법의 적정절차 이념을 앞세우게 되면, 유효하고 실질적인 변호를 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헌법의 변호권 조항의 정신이므로 비록 명문 규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피의자신문참여에서 변호인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는 것이 긍정론의 논거였다. 그러나 학설만으로는 수사실무의 근본적 변화가 생겨나지는 않는 법.

형사소송법 교과서들을 읽어보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변호인의 피의자신문참여를 인정하면서 형사소송법에서 변호인의 피의자신문참여권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무미건조하게 기술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기관 또는 제도 위주의 서술이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다보면 중요한 점을 간과하기 쉽다. 실제로 변화를 이끌어낸 주체는 수사기관의 행태와 맞서 싸운 변호사들(그리고 피의자)이였고, 그 동력은 인권보장을 위한 투쟁의지였으며,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것은 헌법적 형사소송론이었다. 결국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에 나선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역사가 가르치듯이 늘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세상을 바꾼다.

변호인의 피의자신문참여권을 처음 인정한 대법원 판례는 ‘송두율 교수 사건’이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독일의 한 대학교 철학교수로 재직 중인 송 교수가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에서 입국하여 국가정보원과 서울지방검찰청에서 13차례에 걸쳐서 불구속상태로 수사를 받다가 구속 수감된다. 그런데 13차례에 걸쳐서 수사를 받는 동안에는 변호인의 참여 아래 신문을 받았으나 구속 상태의 피의자신문 시에는 피의자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검사가 국가안보 등을 내세워 변호인의 참여를 불허하였다. 대법원은 구금된 피의자에 대한 검사의 피의자신문에 변호인참여를 불허하는 것을 적법절차에 반하는 위법으로 보았다(대법원 2003. 11. 11. 자 2003모402 결정). 그 뒤 불구속 피의자에 대한 피의자신문에도 변호인의 참여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2004년 헌법재판소 판례가 나오고(지금 보면 너무 당연한 판례 같지만 당시 재판관 3인이 반대의견을 밝혔다) 2007년에 이르러서야 변호인의 피의자신문참여권을 형사소송법에 규정하였다.

공판절차와 달리 수사절차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통 알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러다보니 국가형벌권과 마주하는 피의자가 스스로를 방어할 길이 마땅치 않았는데, 변호인의 피의자신문참여가 인정되면서 수사절차가 시야에 들어와 상당한 방어가 가능해진 셈이기는 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 여전히 수사기관에서는 변호인의 피의자신문참여를 수사방해로 보는 시각이 우세한 듯하다. 변호인의 피의자신문참여를 제한하는 예외를 마치 일반 원칙처럼 내세우며 변호인의 피의자신문참여를 입회 수준으로 떨어트리려는 태도가 적지 않다. 변호인은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제도의 발전은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대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행동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런 노력이 쌓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또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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