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 약전 / 故 김 선 태 변호사


독재정권에 정면으로 맞선 민주투사 짓밟힌 서민 인권회복 앞장선 선봉장



1. 강직한 성품

김선태(金善太)는 1911년 8월 8일 전라남도 완도에서 출생했다. 완도중학원 2년이던 어느 날 이른 새벽, 마구간에 매어둔 소의 필경을 떼어버린 다음 집안 식구 몰래 해남 송지장까지 몰고 가서 거간꾼에게 팔아 넘긴 후 그 돈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 중동중학교 경신학교에 편입학하여 신문팔이와 막노동을 하면서 공부하다가 그만두고 법정학교(法政學校)로 자리를 옮겨 고시준비를 하던 중 이를 본 어느 독지가의 후원으로 일본에 유학, 일본대학전문부법과에 입학하게 되고 본격적인 고등고시준비에 열중하여 1939년 3월에 같은 대학을 졸업한 후 그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이어 그는 전주지법에서 사법관시보를 거쳐 1943년 전주지법판사가 되었으나 일본인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한국인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는 독설로 매도하고 여차하면 멱살을 휘어잡거나 뺨을 치는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사법관시보시절에 전주시내 대로상에서 일본인 전주경찰서장을 건방지다고 뺨을 때려 그 용맹이 전 법조계에 알려지게 되고 그 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일본인 상사의 충고나 지시 따위에 승복하지 않았던 그는 그들로부터 철저한 미움을 받고 대전지법청주지청(현 청주지법-당시지청은 현 지원) 판사로 자리를 옮겼다가 1945년 4월에는 멀리 함경북도 청진지법 회령지청판사로 좌천되었다.

그는 1945년 8월 조국이 광복되자 판사 생활을 그만두고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여 서민들을 위한 인권옹호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국민대학 감사 겸 강사로서 후진교육에도 열을 올리는 등 바쁜 생활을 보냈다.



2. 정계진출

그는 1954년 5월 20일 실시되었던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치열한 경쟁끝에 7표차이로 차점을 누르고 당선된 후, 1958년 5월 2일 제4대, 1960년 4·19 학생의거 후 실시된 1960년 7월 29일 제5대 총선까지 3대를 거듭 완도에서 당선되어 제2공화국 장면 민주당 내각의 무임소장관으로 취임하였다.

1954년 11월 29일 사사오입이라는 전대미문의 악법 개헌안을 통과시킨 자유당의 횡포와 만행에 분격한 야당 국회의원들은 1954년 12월 30일 호헌동지회(護憲同志會)를 구성, 1955년 9월 19일에 과거의 ‘민주국민당’이 야당 세력의 중심이 되어 새로이 ‘민주당’으로 창당 개편되었다.
김선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겨내고 창당된 민주당의 창당 발기위원 19명 중의 한 사람으로 끼었으며, 여러 부서 중에 집권 여당인 자유당과 정면대결로 싸워야 할 민주당 인권옹호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정계에 진출한 김선태는 6년 세월의 의정활동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정치에 정면으로 맞서고 나선 민주투사요, 짓밟힌 인권회복을 되찾는데 앞장 선 선봉장이었다.



(1) 자유당 횡포에 대항

1956년 7월 27일 김선태 변호사 등 야당계 국회의원 72명은 당시 박두한 지방선거 입후보자등록 마감기일의 연장을 기하고자 지방선거등록기일 연장임시조치법의 통과가 좌절되어 지방선거등록방해에 대한 자유당의 횡포에 대하여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선전문을 낭독한 후 비폭력, 무대항주의로 시가행진을 행하였다.

그러나 무수한 경찰대의 제지와 방해에 봉착하여 피차 시비하는 가운데 데모현장에서 이익홍 내무부장관은 “김선태 놈 잡아라”고 외쳤으며, 김종원 치안국장은 김의원을 발길로 차면서 머리를 발로 누르기까지 하였다. 지프차로 김 치안국장과 같이 종로서에 가자 김국장은 손을 비틀면서 유치장 안으로 그를 처박았다. 그는 이렇게 붙잡혀 공무집행방해죄 및 소요죄로 긴급구속된 후 28일 서울지법 문영극 판사에 의하여 구속영장이 정식 발부되었다.

이에 김춘봉 변호사는 변호인으로서 서울지법에 구속적부심사를 신청하였다. 31일 문영극 판사는 강서룡 부장검사관여로 2시간 동안에 경찰관 등 45명을 심문하였고, 김춘봉 변호사외 엄상섭, 조재천, 김종근, 김윤근, 주도윤, 윤형남 씨 등으로 구성된 그의 변호인단은 국회의 석방 결의를 무시한 국법 유린은 어불성설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는 변호를 하였다.

문영극 판사는 제1형사부 윤학로 부장판사와 합의한 결과 석방을 명하는 결정을 내려 긴급구속된지 126시간 만인 8월 1일 밤에 석방되었다.



(2) 민중의 지팡이

1957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 장군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미국 국가원수를 맞이하려는 서울 장안의 경계는 자뭇 삼엄했다. 서울시청에서 국회의사당 앞을 거쳐 중앙청에 이르는 태평로 일대를 관할 경찰서장이 직접 나와 진두지휘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삼엄한 경계망을 지나가는 김선태 의원은 울화가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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