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실수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실수였다.” 보수주의자로 평가받는 아이젠하워(Eisenhower)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 중 얼 워렌(Earl Warren)을 연방대법원장에 임명한 것을 두고 이렇게 회고했다고 한다.

얼 워렌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란다원칙’이나 ‘분리된 교육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는 선고 등 투표권, 흑인민권, 피의자 인권, 교회와 국가의 관계 등에 관하여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의 폭넓은 해석을 관장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그런 입장이 임명권자인 아이젠하워에게는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다.

최근 대통령의 헌법재판관 지명을 두고 우리 사회에 논란이 있다. 대통령이 검사 경력을 가진 민변 출신 변호사를 헌법재판관 후보로 내정하자, 일각에서 내정자가 올해 있은 대통령 선거 전에 더불어민주당의 ‘인재영입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던 사실이나 2011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박원순 지지 선언’에 참여하였던 사실 등을 들어 우려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야당은 후보자의 정치적 중립성 훼손을 우려로 자진사퇴와 지명철회를 요구하고 나섰고, 청문회를 통해 공정성과 중립성을 담보할 수 있는 후보자인지 철저히 검증하겠다고도 한다.

헌법수호의 보루인 헌법재판관이 공명정대해야 함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여당이 된 정당의 인재영입 대상이었다든지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특정 정당의 후보자를 지지했다든지 하는 사유로 자진사퇴나 지명철회를 요구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자 지나친 정치공세가 아닌가 한다.

특정 정당의 영입 대상이었다거나 특정 후보의 지지자였다는 사실을 넘어 좀 더 구체적으로 정치적 편향성 때문에 헌법재판관 직무를 수행하기에 곤란할 만한 다른 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헌법재판소는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산물이다. 대학 신입생으로서 두려움에 떨며 대학로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기억이 난다. 시민들은 그해 대통령 직선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민주 헌법을 쟁취하였다. 그리고 과거 사법부가 군사정권의 독재를 견제하는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반성적 고려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견제하고자 제2공화국 헌법에서 인정되었다가 제3공화국 헌법에서 폐지된 헌법재판소를 부활하였다.

‘헌법의 수호자’라는 벅찬 기대와 ‘태어나서는 안 되는 사생아적 기관’이라는 일부의 우려 속에 1988년 9월 출범한 헌법재판소는 그동안 각종 법률의 위헌여부 심판은 물론 노무현,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대한 헌법소원 등 정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하여 오면서 어느덧 29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근래 들어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법원이나 헌법재판소에서 해결되는 이른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헌법재판관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경우에 따라 임명권자로 하여금 자신의 임명을 후회하게 만들 수도 있는 투철한 헌법정신과 이를 관철할 수 있는 용기 같은 건 아닐까?

헌법재판관은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이나 자신을 지명한 국회 그리고 대법원장의 단순한 대변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후의 재판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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