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던 곳을 떠날 때 깨닫는다. 이렇게도 버릴 것이 많았던가. 그 동안 나는 왜 저걸 붙잡고 있었던 것일까? 무엇을 위하여? 물론 꼭 필요하다고, 혹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내 곁에 모여든 것들이었다. 그렇게 일단 붙잡은 것이니 쉽게 버리지 못해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그런데 신기하다. 일단 버리고 나니 무엇이 내 곁에 있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엄청난 양을 버렸지만 시간이 흐르니 일말의 아쉬움조차 생기지 않는다. 다시 묻는다. 왜 난 그것들을 붙잡고 있었을까.

물건을 버리는 것은 차라리 쉽다. 내 머리,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의식과 무의식, 사상과 관념, 내 몸에 밴 습관은 어떤가. 세상에 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사람들과 관계하면서, 자연, 사회, 국가와 마주하면서 내 안에 쌓아온 많은 것들이 모두 붙잡고 있을만한 것일 리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버릴지 선택하기란 물건 버리기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것들이 나의 자아정체성(ego-identity)을 이루는 것들이기 때문. 그래서 누군가가 내 생각이나 행동의 습관, 방향 등을 지적할 때 나는 일단 방어하기 바쁘다. 심지어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까지 일으키기도 한다.

반면 나는 무엇이든 제대로 비판할 수 있고,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조언할 수 있다는 생각에 차 있다. 내가 하는 대화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소통이라는 오만한 착각. 배우고 읽고 경험한 것이 많아질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런 성향은 더더욱 강해진다.

우리 사회처럼 나이나 사회적 신분을 내세우는 곳에서는 더 그렇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내게 달라붙은 것들을 나와 동일시한 채 고집을 부리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분명히 고집이다. 어떤 인연으로 내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들을 지키고 있는 힘은, 어떤 때는 자존심으로, 또 어떤 때는 긍지로, 다른 때에는 명예로, 혹은 의지로, 그때그때마다 여러 가지 다른 얼굴로 나타날지라도 결국 무엇을 붙잡으려는 고집이다. 세상에 태어나 일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이 고집이 알찬 구실을 한 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고집을 버려야 오랜 세월을 흐르며 내게 달라붙어있던 버려야 할 것들을 비로소 찾아낼 수 있게 된다. 그로부터 온전히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이 온다.

나를 포함하여 법률가들 중에는 고집이 강한 사람들이 많다. 직업적으로 법률가는 존재(“…이다”)에 관한 말보다 당위(“…이어야한다”)에 관한 말을 더 비중 있게 구사할 수밖에 없다.

언어는 의식을 규정하기도 하니 법률가들이 있는 그대로 존재를 받아들이기보다는 당위(규범)를 앞세우는 사유방식에 빠진다고 해서 특별한 일은 아니다. “무엇은 반드시 이래저래 해야 한다”는 고집이 공정한 원칙주의로 나타나면-비록 융통성이 부족한 게 흠이라고는 해도-그나마 좋으련만, 세상사 자주 그렇듯이 시대정신을 외면하는 불통과 자기폐쇄성으로 흐르기 더 쉽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니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문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절하하려는 관념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처럼 불통과 자폐에 빠진 법률가 개인 개인이 모여서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할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갈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 그러나 버려야 할 것들을 제 때에 버리지 않으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모든 시작은 밥 한 끼다”라는 화두를 던진 드라마 ‘비밀의 숲(이수연 극본, 안길호 연출)’으로 여행을 가보시기를 권한다. 무엇을 버려야 제대로 살 수 있는지 검찰과 경찰, 나아가 법률가, 시민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메시지가 실로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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