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부쩍 자주 접하는 말이 ‘다수 야당의 행패’라는 것이다. 이 말에는 정당정치의 문제점도 들어 있지만, 다수결의 그것도 들어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다수결의 문제점을 생각해 본다. 물론 다수결이 최선책이 아니고 차선책이라는 데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을 때 언제까지고 토의와 토론을 계속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의견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자 중에는 편견을 무턱대고 고수하는 자도 있고, 감정적으로 우기는 자도 있고, 전제 되는 사실 중 뭔가를 잘못 알고 핏대를 올리는 자도 있으니, 다수결이 차선의 편법은 될 수 있는 경우도 흔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깊은 통찰력을 가진 의견이 소수로 몰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원래 ‘뛰어나다’라는 말 자체에 ‘탁월한 것은 소수(少數)’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데, 토의할 때는 그 소수가 탁월함이 아니라 고집스러움, 부족함, 부적절함 등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천양지피는 불여일호지액, 천인지낙락은 불여일사지악악(千羊之皮는 不如一弧之腋, 千人之諾諾은 不如一士之諤諤)’이라고 했다.

사실 전문가 1명과 비전문가 10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그 전문가의 소관 사항에 관하여 토의를 한다면 10 대 1로 전문가의 의견이 열세에 있다 하더라도 그 전문가의 의견이 잘못 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비단 전문적인 사항이 아니라도 뛰어난 통찰력이나 식견을 갖고 있는 사람의 의견은 그렇지 않은 다수의 지식인의 의견보다 더 나은 경우도 왕왕 있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이라는 영화는 다수결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살인 피고인에 대하여 배심원회의에서 배심원 11명은 유죄를 주장하였고, 오로지 1명만 무죄를 주장하였는데, 무죄 주장자가 수의 절대 열세에 절망하여 자기의 주장을 양보하였다면 피고인은 전기의자에 앉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조리 있게 끝까지 무죄의 근거를 또박또박 개진하였고, 장시간 토의가 허용되었기에 유죄 주장자는 한 사람 한 사람 자기의 의견을 무죄로 바꾸었고 결국 무죄로 평결이 된 것이다.

이러한 극적인 예는 실제로는 자주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일어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비화도 그 예이다. 당시 맥아더가 지지한 인천상륙작전안의 지지자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참모총장들을 비롯한 많은 참모들이 그 작전을 반대하였다.

이에 맥아더는 45분간의 열변을 토하며 그들을 설득하여 결국 그들의 찬성표를 얻어 내었고, 결과 성공률 5000분의 1이라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것이다.

또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그리스의 3대 철학자들 모두도 다수결 내지 민주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들이 민주주의를 우중정치(愚衆政治)라고 비판하는 이유 중의 가장 큰 것이 바로 다수결 때문이다. 한국의 자유당 시절의 선거를 ‘고무신 선거’라고 풍자한 것도 무식한 부녀자들에게 고무신 한 켤레 사주면 표를 주고, 그러한 표들을 다수 취득한 자가 국회의원 등에 당선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후보자의 인품이나 재능, 정치 능력 등에 대하여 지식인들도 제대로 알기 어려운데 무식한 부녀자들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또 여론이라는 것은 마치 불길 같아서, 다수 의견쪽에 붙은 불길에 더 많은 사람이 쏠리면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어 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크게 확산되어 마침내 이성을 태워 버린다. 1세기 때 유대인 사회에서 극소수파에 불과한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렇게 처형되었고, 전 역사에 걸쳐서 그러한 일들은 수없이 되풀이되었으며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물론 여론의 순기능도 무시할 수 없지만 역기능도 그에 못지 않게 크다. 그 역기능의 원인은 여론이나 다수 의견이 주로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하여 형성된다는 데 있다. 여론은 말(馬)과 같아서 마부의 채찍질에 따라 미친듯이 달린다. 마부가 비교적 덜 이성적이라면 말의 질주는 대단히 위험하고, 길 아닌 데도 거침없이 달리게 마련이다. 다수결에 있어서도 다수 의견을 주도하는 소수의 영향력 있는 사람의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이는 경향을 보인다. 다수에서 떨어지는 데서 소외감과 불안감을 느껴서 무비판적으로 다수 의견을 따르게 되는데 이를 동조화 현상이라고 하고, 어빙 제니스는 이를 집단사고(group think)라고 명명하였다.

케네디 행정부 시절 쿠바의 침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이 바로 이 집단사고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주요 각료들이 그 작전이 말도 안 되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당시 주도 세력인 몇몇 각료들의 주장에 감히 반대를 하지 못하고 동조하였던 것이다. 또 개미 떼의 행진에서 관찰된 바로서 선두의 개미가 잘못된 길을 선택하면 뒤따르는 개미들의 떼 죽음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소위 원형 선회(circular mill) 현상 역시 무비판적인 추종의 치명성을 말해 준다.

다수결의 역기능을 최대한 제어하기 위하여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충분히 토의하고 회의 참여자 모두가 한결같이 차분하고 이성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 절대적 조건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누구든지 각종 이해관계에 얽혀 있고, 파벌이나 참여자간의 친소관계가 있으며, 다루어지는 사안에 대하여 충분하고도 깊은 지식이 모자라며, 언제까지나 무한정 토의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다수결을 대체할 만한 방법이 없다 하더라도, 초등학교 때부터 토론 문화를 더 활성화하고, 한국적 정서를 적절히 제어한다면 다수결의 문제를 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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