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변기였을까. 현대예술 강의에 빠지지 않는 마르셀 뒤샹의 변기 ‘샘’이 미국 독립예술가협회의 전시회장에 들어선 게 꼭 100년 전이다. 그저 상점에서 값을 치르고 서명만 했을 뿐, 소조나 조각조차 아니었다. 한낱 변기가 예술작품으로 대접받은 것은 그 자체의 철학적 의미에 있다. 원래 있어야 할 남자화장실 대신 전시장에 놓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새 예술의 개념으로 이해됐다. 예술의 고고한 모습을 깨려는 시도로, 변기만한 소재도 없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14층에는 황금 변기가 전시됐다. 그 물건이 주는 묘한 정서는 인류 공통인 모양이다. 황금변기를 누구든 이용하라 했더니 관람객들이 오히려 당황했다. 성폭행을 당했다고 거짓 주장한 여성들이 피해 장소로 화장실을 지목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연예인이 괜한 구설에 시달렸다. 그가 그렸다는 변기 그림들을 두고 심리학자들이 애착을 운운했다. 이후 무고가 설시된 판결문을 읽어보니 화장실 심리학은 통찰이라기보다는 갖다 붙인 해석 같았다.

사돈댁과 함께 멀수록 좋다지만 변기는 아무래도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 역사학자들은 전염병 공포를 없앤 변기를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꼽는다. 활자나 컴퓨터가 아닌 화장실 물건을 꼽는 장면에 일견 의아했다. 하지만 하이힐이며 파라솔이 오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려 고안됐다는 말을 들으니 곧 수긍이 됐다. 몇해 전 지하철에서 지내던 삼남매가 공원 화장실 변기뚜껑을 밥상 삼았다는 사연이 보도된 적도 있다. 먹고 사는 비극의 역설에 눈물 훔친 이가 많았다.

왜 하필 변기였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도 변기와 관련한 말들에 시달렸다. 출두 장면을 보면 그럴 리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가 검찰 조사를 받을 때 개인 변기를 지참했는지 진심으로 궁금해 했다. 검찰청 직원들조차 10층 여자화장실이 수리됐는지 아닌지 두런두런 말을 나눴다. 대통령의 1회용 변기에 쓸 돈으로 일선 학교 푸세식 변기를 바꿔야 한다는 국회의원 발언도 회자됐다. 대통령의 고고한 모습을 깨려는 시도로, 변기만한 소재도 없었을 것이다.

뒤샹이 말해준 것은 변기도 미술관에 가면 예술 작품이 된다는 미학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가르쳐준 것은 권력자도 검찰청에 가면 죄인이 된다는 이치였다. 100년 전 변기가 전시장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이들은 ‘샘’을 미술관 밖으로 내보내려 했다. 대통령이 검찰청에 오면 안 된다고 생각한 이들이 종일 목놓아 탄핵무효를 외쳤다.

‘샘’은 이제 예술 작품이고, 박 전 대통령은 귀가하며 아무런 질문을 받지 않았다. 씻기기만 한다면야 변기에 흘려보내고 싶은 날이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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