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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기자실]일주일에 500억 모으기
양은경 조선일보 기자·변호사  |  ke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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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8호] 승인 2017.02.27  10: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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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 근무 35년 동안 회원사들에게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하기는 처음입니다.”

지난 13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최순실씨 등의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선 전경련 박찬호 전무의 말이다. 그는 다른 전경련 실무자들과 함께 미르K스포츠 재단 모금에 관여했다.

시작은 이승철 부회장이 2015년 10월 중순 안종범 경제수석으로부터 받은 전화 한통이었다. “기업이 참여하는 300억 규모의 재단을 일주일 내에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와대가 전경련에 재단설립을 지시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례적인 일은 줄줄이 이어졌다. 대상 기업도 이미 청와대에서 점찍어 내려 왔다. 기업별 출연액은 전경련이 정했지만, 그 방식은 매출액에 비례한 것으로 철저히 기계적이었다. 돈을 낸 기업은 재단 이사진에 이름 한명도 올리지 못했다.

역시 청와대가 정한 창립총회일 10월 26일을 불과 이틀 앞두고, 다시 “300억이 적으니 500억으로 늘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때는 토요일 오후였다. 거의 하루만에 200억을 충당해야 했다. 박찬호 전무는 “명함 한번 주고받은 게 전부인 기업 담당자들에게도 전화를 했다”며 “휴일에 운동을 하거나 쉬는 사람도 있어 짜증을 많이 냈다”고 했다. 그렇게 16개 그룹으로부터 500억에서 14억 빠진 486억이 모였다.

이렇게 무리한 요구에도 전경련은 싫은 소리 한 마디 못하고, 기업들도 눈치를 보며 동참했다. 이승철 부회장은 “김우중 회장과 경제수석과 사이가 틀어져 대우가 무너졌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기업 인허가와 금융지원 사항 등을 틀어쥔 경제수석의 요구이고 이는 곧 대통령의 뜻이기 때문이다. 출연 기업인 CJ의 조영석 부사장은 법정에서 “대통령의 관심사항이어서 거부할 수 없었다. 공익성이 낮은 재단이어도 돈을 냈을 것”이라고 했다. CJ는 이미 이미경 부회장이 물러났고, 국세청 특별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른 상태였다.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은 특검이 ‘직권남용 피해자’에서 ‘경영권 승계 수혜자이자 뇌물공여자’로 이 부회장의 위치를 바꿔놨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의 재단출연액 204억원도 ‘뇌물’로 영장에 포함돼 있다. 다른 기업으로도 뇌물죄 수사가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달 가까이 재판을 지켜 본 소감으로는 ‘뇌물’보다는 ‘준조세’에 더 가까워 보인다. 뇌물도 등떠밀려 줄 수는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제3자 뇌물죄가 성립하기 위해 필요한 ‘부정한 청탁’이 끼어들기에는 스케줄이 너무 빡빡하고 모금 방식이 강압적이다. 청탁의 특별한 정황이 추가적으로 밝혀진다면 또 모르겠다.

“경제수석과 사이가 틀어져 대우가 망했다더라”는 이승철 부회장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법적 처벌 못지 않게 정부와 기업의 1980년대식 갑을관계 실체 규명이 중요해 보인다. 또다른 비선실세를 등에 업은 제2, 제3의 미르재단 출현을 막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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