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가 없다. 활자로만 세상사를 접한다. 가끔씩 인터넷 동영상으로 시청감각을 일깨우긴 하지만 아무래도 일상적으로 TV를 접하는 사람들보다는 감각이 심심한 편이다. 그러다보니 김미경 서울대 교수가 화장을 안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한번 시작하면 계속 해야 되니까”라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의 아내도 일년에 한두번 화장을 한다. 치장에 관한 한 천성적으로 게으르니, 의전과 형식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약간의 불리함을 안고 사는 것 같다. 그래도 치장에 관한 게으름을 좋게 봐주는 남편을 만난 덕에 가족 사회에서는 아무런 불리함 없이 살고 있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를 인지하고도 ‘올림머리’를 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들인 사실을 확인하고 기가 막혔다. 그놈의 의전이 뭐길래 그 급박한 순간에까지 의전에 신경쓰느라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단 말인가.

강준만 교수는 ‘의전 망국론’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박 대통령을 ‘의전 권력에 중독된 의전 대통령’이라고 표현하면서, 의전 권력에 중독된 의전 대통령이 진공 상태에서 생겨난 게 아니라 범국민적으로 자신의 서열을 지키기 위한 욕망과 그 상징인 의전에 미쳐 돌아가는 토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의전을 즐기기 보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워할 것 같은 사람들이 권력자가 되거나 권력자 주위에 많이 포진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토양을 바꾸는 커다란 계기가 될 수 있다. 사회를 망가뜨리는 것도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회를 개혁하는 것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제도도 중요하지만 어떤 자리에 어떤 사람이 가는가도 중요하다.

“행사의 의미나 알맹이는 뒷전으로 밀린 가운데 ‘의전의, 의전에 의한, 의전을 위한’ 행사가 수없이 열리고, 의전 때문에 서열 낮은 수많은 사람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만드는 일이 상습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강준만 교수의 세태 묘사를 억울해 할 공직자들도 가끔씩 접한 적이 있다.

수백명이 모인 자리에 서열 1위 자격으로 초대받은 국회의원이 자신이 발언을 하면 시간만 낭비된다며 발언을 사양한 경우도 직접 접하였고, 집무실을 대폭 축소하면서 시민들에게 완전 개방한 시장의 사례도 접하였다. 나는 이들에게서 토양 변화의 작은 희망을 본다.

화장품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욕먹을 소리지만, 나는 권력자 주변에 화장을 안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들의 정성만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꾸밈 없는 태도도 존중받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의전 갑질’이 줄어들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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