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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협 활동이 꾸준한 공익활동의 원동력”제5회 변호사공익대상 수상자 위은진 변호사
임혜령 기자  |  news@koreanba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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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호] 승인 2017.01.16  10: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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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5일 제75회 변호사연수회에서 제5회 변호사공익대상을, 2015년에는 제1회 사회공헌대상을 받으셨습니다. 공익활동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와 끊임없이 하게 된 동기가 있으신가요

처음에는 공익활동이 아닌 사업의 일환으로 이민에 대해 알아보다가 우리나라에 이주민이 많이 들어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 이주해 온 대다수 외국인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제가 돈을 받고 소송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들을 돕고 지원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막상 이주민을 도우려 하니 막막했습니다. 때마침 대한변협신문에서 유엔이주노동자권리협약에 관한 공청회 소식을 보고 공청회를 준비하던 위원회 위원장이신 이상중 변호사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일면식도 없던 분인데 전화 연결은 계속 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오늘까지 연락이 안 되면 그만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마침 연락이 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함께 공청회 준비를 할 변호사가 적어 제 연락이 반가웠다고 합니다. 당시 모임에서 간사로 활동하는 황필규 변호사가 모임 일정을 전달해줬습니다.

당시 모임에는 위원장님을 제외하고는 저를 포함해도 네명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뒤늦게 합류해서 가장 쉬운 분야를 맡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이 모임에서 만난 분들과 이미 이주민 관련 인권활동을 하시는 변호사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관련 강의도 하면서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2007년 변협 인권위원회 산하에 이주외국인인권소위원회가 생겼고, 저는 2009년부터 6년간 소위원장을 맡았습니다. 당시 저는 역량이 부족했지만 이주민 인권 활동을 하는 변호사가 많지 않아서 위원장직을 맡게 됐습니다. 소위원회는 제가 꾸준히 이주민 관련 공익활동을 할 수 있는 바탕입니다.

2013년 이주외국인인권소위원장으로서 주도적으로 준비해 발간한 ‘이주외국인 법률매뉴얼’이 나오자마자 소진될 정도로 많은 변호사가 찾았습니다. 인기 비결과 향후 개정판 계획 여부를 알려주세요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기획했고, 변협의 풍부한 인적네트워크를 통해 훌륭한 집필자분들을 모실 수 있었던 것이 비결인 것 같습니다.

이주외국인 소송 구조, 상담을 할 수 있는 변호사풀이 확대되길 바라며, 이에 중점을 뒀습니다. 매뉴얼이 아주 잘 만들어졌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관련 도서가 별로 없고 변호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개정판을 원하는 변호사가 있다면 개정판을 낼 필요가 있다 생각합니다. 2013년 이후 이주외국인 관련 판례가 많이 쌓여서 판례를 모아 책을 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특히 체류 부문은 관련 도서가 없어서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아는 게 없어서 처음에는 출입국 공무원에게 절차 등을 배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득문득 출입국 공무원 마인드로 일을 하는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실무를 하면서 문제의식을 갖다 보니 차츰 생각은 바뀌게 되었습니다. 인권활동을 하지 않던 변호사가 같이 소위원회에서 활동하면 처음에는 위원들 간 견해차가 심하고 갈등이 생기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활동을 하다 만난 몇몇 분들은 저에게 “한국분이 왜 외국인 인권만 생각하시냐”, “왜 한국 남자는 안 돌봐주고 외국인 여자만 돌봐주느냐”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성매매·성폭력 피해 여성 등 여성 인권, 결혼 이주여성 등 이주외국인 인권 관련 활동을 주로 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무엇인가요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사건이고, 이 사건으로 지난해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이달의 明 변호사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활동가가 보기에 부당한 사건이라며 검토해달라고 했습니다. 그간 비슷한 사건의 판례를 보는데 승소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트남 여성이 시계부로부터 강간과 강제추행을 당해 시계부가 징역 7년을 받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베트남 여성, 즉 자신의 아내가 시아버지를 꾀었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성은 13살 때 베트남에서 약탈혼을 당했습니다. 당시 약탈혼을 자행한 남자가 폭력적이라 남편과 같이 살 수도, 친정에서는 풍습 때문에 이 여성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습니다. 결국 움막에서 애를 낳고, 도시로 왔다가 한국 사람을 소개받아 결혼했습니다. 한국 남편을 소개해준 사람에게 본인의 출산 경험을 남편에게 말해달라고 했더니 “잘 살기만 하면 돼”라고 했다고 합니다.

1심에서는 혼인취소가 됐습니다. 공동변호인단을 꾸려 본격적으로 2심을 준비했습니다. 2심에서도 위자료 액수는 줄어들었지만, 혼인취소가 선고됐습니다. 더 많은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해 대법원에 상고하고, 파기환송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제 파기환송심 선고를 앞두고 있습니다.

또 다른 안타까운 사건은 오해로 인해 이혼한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이주여성이 한국말을 못 해서 한국에서 먼저 결혼한 같은 국적 여성에게 통역을 부탁했는데 통역이 잘못돼서 오해가 쌓였습니다.

남편 사촌 형이 간암이라 간 이식 수술이 필요해서 가족들 모두 혈액검사를 받았는데 부인이 이식 가능한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남편은 간을 부분 이식해줄 것을 부탁했는데, 부인은 간을 전부 가져가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신종 장기매매’인가하며 매우 심각했습니다. 추후 남편 답변서를 받고 법정에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남편도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오해를 풀고 재결합할 수 있겠냐고 여성에게 이야기했는데 1년간 겪은 갈등 때문에 남편을 믿을 수 없다고 해서 결국 이혼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서로 의사소통이 안 돼서 싸우고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는 것을 보면서 통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습니다. 사법통역 시스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정착 전까지는 통역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법원에서는 죄의 유무, 일상에서는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예전에는 변호사 업무가 너무 힘들어서 자녀가 변호사가 되겠다고 하면 말리고 싶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어떠신가요

해마다 생각이 바뀝니다. 변호사는 남들의 고민을 대신하고 뒤치다꺼리를 해야 해서 고되고 힘듭니다. 변호사 일보다 창조적이고 재미있는 일을 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보람 있는 일이니까 본인이 변호사를 하겠다고 하면 말리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지금까지는 변호사를 하고 싶지 않아 합니다. 평일에는 늦게 들어오고 주말에도 일하니까 변호사라는 직업을 안 좋아합니다.

어린 시절 꿈은 무엇인가요

꿈은 계속 바뀌었습니다. 과학과 수학을 좋아해서 과학자가 되고 싶기도, 탐험가 마젤란을 보고 탐험가가 되고 싶기도 했습니다. 화가가 되고 싶을 때도 있었고, 이청준 작가의 ‘당신들의 천국’을 보고 오지에 가서 남들이 외면하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과학자 겸 의사 겸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관한 책을 보고 롤모델로 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천재고, 저는 그렇지 못하다는 걸 곧 깨달았습니다.

대학생 때 배낭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는 무역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회사에 입사하여 수출팀에 근무했는데, 당시 제가 처음 해외사업부에 근무하게 된 여성이라고 했습니다. 남자 팀장들이 저와 해외출장을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지금은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출장 기회가 계속 없어서 성차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담당 업무인데도 다른 부서 남자 동기를 출장에 데려가는 일도 있다 보니 향후 인사고과에서도 차별을 받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성차별 없는 직업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사법시험을 보게 됐습니다. 이전까지는 법률가가 될 거라고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어릴 적에 “나중에 판사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하시긴 했는데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교육의 영향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인류에 도움이 되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했습니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나요

저는 저에게 잘 맞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판사는 정리된 이야기를 보지만 변호사는 사람을 만나 어디까지 튈지 모르는 이야기를 듣고 법리적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상담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데 스트레스를 크게 받지 않는 편이라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편입니다.

공익활동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변호사에게 해주고 싶은 말

공익활동은 혼자 하는 것보다 연대해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협에 있는 위원회가 인적 네트워크 형성에 도움이 됩니다. 변협에는 이주민 인권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인권활동을 하는 소위원회도 많이 구성돼있습니다. 위원회에서 본인이 관심 있는 일을 활동과 공부를 먼저 시작한 분들을 통해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할 수 있습니다. 대한변협신문 등을 통해 변협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보고 변협에서 활동을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변협 홍보팀

[약력]▲사시 41회 ▲변협 인권위원회 부위원장·이주외국인난민인권위원 ▲민변 여성인권위원회 산하 이주여성법률지원단장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운영위원장 ▲한국교육방송공사 성희롱고충상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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