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사건을 변호사에게 위임하면서 “변호사를 샀다”고들 한다. 듣기 거북한 이 표현에는 ‘변호사는 돈만 밝힌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렇다면 변호사는 팔려가야만 하는 존재인가? 과연 변호사의 혼은 비정상인가?

#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 사이 한국 사회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유영철 사건이 있었다. 그는 무려 21명의 무고한 시민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그는 단순히 살해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복수심과 혐오감을 갖고 있던 그는 피살자의 장기를 훼손하고 사체를 유기하기까지 했다.

수사를 통하여 그의 연쇄 살인 범행이 밝혀져 기소되었으나, 재판정에서 그를 변호해줄 변호인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국선변호인으로 지명된 변호사들이 한결같이 손사래를 쳤다. 그를 변호한다고 하는 순간 불어 닥칠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차형근 변호사가 유영철의 형사 변호를 맡겠다고 했다. 당연히 온라인·오프라인 할 것 없이 그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주로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그런 식으로 돈 벌지 말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소신과 사명감이 있었다. 천주교 교정사목위원회의 회원이었던 그는 열렬한 사형제 폐지론자였다. 차 변호사는 국민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그는 유영철에게 내려진 법원의 사형선고에 대하여 사형 제도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항소를 거듭하였고, 그의 이러한 태도는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또한 심각한 트라우마는 피할 수 없었다. 유영철은 피해자의 사체를 훼손하는 과정을 자랑스럽게 말하곤 하였는데 변론 준비 과정에서 그 얘기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괴기스러움과 혐오감 때문에 제대로 식음을 못 하고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변호사 개인으로서는 경제적 이익도 없고, 명예도 주어지지 않는 사건의 변론을 자처한 것만으로도 커다란 희생이었을 터. 하지만 그의 희생이 있었기에 국민적 공분과 혐오의 대상이 된 희대의 악인일 망정 우리의 헌법적 가치가 차별 없이 적용되고 사법적 체계가 작동할 수 있음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다. 그의 용기와 신념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 지금 우리는 국가적 명운이 달린 대단히 민감한 대형 사건들이 사법적 절차 혹은 이와 유사한 절차를 밟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최순실씨에 대한 형사재판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절차가 그것이다. 최씨의 경우 국정농단, 이권개입, 딸 대입 부정입학 등으로 국민의 공적(公敵) 1호가 된 지 오래다. 박 대통령 역시 비선 실세의 존재와 ‘세월호 사건 잃어버린 7시간’ 의혹으로 도도한 촛불 민심에 맞닥뜨렸다. 국회의 뜻에 따라 하야하겠다고 백기투항했지만, 탄핵소추를 피하진 못했다. 직무정지 직전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4%였다.

최순실씨에 대한 형사 재판이 며칠 전에 있었다. 최순실씨의 변호를 담당한 변호사가 법정 밖에서 언론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 시민 몇 사람이 소리를 쳤다. “변호사, 그런 식으로 돈 벌지 마!” 대통령의 형사 사건을 담당하는 변호사나 대통령의 탄핵 심판을 대리하는 변호사들의 운명도 이와 다르지 않다. 비슷한 비난과 조롱에 시달린다.

# 법조인의 입장에서 이런 사태를 지켜 보는 것이 당혹스럽다. 변호사가 국민적 분노가 집중되고 혐오감이 극에 달한 사건을 수임하는 데는 경제적 이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을 필요로 한다. 변호사 배지를 달고 있는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의 용기와 신념은 존중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또 다른 변호사 차형근’으로 치열하게 소임을 다 하는 모습을 격려하고 싶다. 물론, 이념적으로 보수인지, 정치적으로 여당·친박인지와 상관 없다. 오직 법조 동료 의식에서 하는 말이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