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소송의 이념으로 적정, 공평, 신속, 경제의 4가지를 꼽는다. 이런 이념을 구현하기 위하여 대법원과 대한변협이 머리를 맞대고 재판제도개선협의회를 꾸려 운영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위에서 든 이념 중 가장 중요하다는 적정한 재판의 중요성 못지않게 신속한 재판의 중요성이 최근 법원 쪽에서 크게 강조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진술서 제도를 활용하는 범위를 넓힌다느니, 가급적 1심에서 충실한 심리를 하고 상급심에서는 가급적 1심의 결과가 변경되지 않도록 하라는 등의 내용들이 보도되고 있다.

오랜 기간 변호사 생활을 해온 나로서는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신속한 재판이란 구호는 대단히 좋아 보이나 혹시나 신속한 재판을 위하여 적정한 재판의 이념이 희생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많은 변호사들은 실제로 이런 우려가 현실화되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증인마다 아는 사실이 한정적이라 여러명의 증인이 필요하다 싶어서 신청하니 그 중 한명만 신청하라고 한다거나, 감정결과가 아무리 이상해도 재감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느니, 심지어는 상대방 준비서면을 법정에서 받았기에 다음 기일에 대응하는 준비서면을 내겠다는 변호사에게 법정 밖에서 검토하고 조금 후에 그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고 강요하는 재판장도 있다. 또 원고와 피고 모두 조정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계속하여 합의를 강요하는 재판장도 있고, 항소심 첫 기일에 항소인 측 대리인에게 항소이유가 이상하다면서 마구 야단치더니 결국에는 항소취하하겠다는 말을 받아내는 재판장도 보았다. 본의 아니게 항소취하한 젊은 변호사가 어찌나 딱해 보이든지….

증인이나 당사자 본인의 신문사항이 길 경우 진술서로 주신문을 갈음하겠다고 하는 경우는 어떠한가. 상당히 효율적인 제도로 보이지만 신청하는 측에서는 뭔가 미진함을 지우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특히 다른 입증방법이 마땅찮아 당사자 본인신문을 하는 경우, 진술서 방식으로 주신문을 하게 되면 준비서면으로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법정에서 판사가 당사자의 태도와 말을 직접 보고듣는 것과 진술서만 보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터인데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증인이나 당사자 본인 뿐만 아니라 신문 진술서 제도를 잘 활용하면 미국식 디스커버리 제도의 장점을 활용할 수 있고, 쟁점 파악에도 유용하니 쌍방으로부터 진술서를 받아 재판의 기초 자료로 삼자는 진술서 제도를 주장하는 견해도 법원 쪽에서 나오고 있지만, 과연 우리 실정에 부합하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 든다.

특히 항소심에서 1심에서 추가 입증을 하겠다고 하는 경우에 “1심에서 충분히 다루었으니 특별한 사정 변경이나 사유가 없는 한 우리 재판부에서는 새로운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라는 재판장을 만났다면 변호사는 그 말이 쉽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재판부는 1심에서 완벽한 공격과 방어를 하라는 것인데, 사람이 하는 일에 반드시 그러하기 쉬운가. 또 1심보다 풍부한 경험과 지식과 지혜를 가진 2심 재판부로부터 충실한 재판을 받아보고자 하는 당사자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인가.

상급심에서 1심의 결과가 가급적 변경되지 않도록 하자는 견해는 현실을 무시하고 재판의 당사자보다 재판부의 편의를 위한 견해는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어떤 경우에도 적정한 재판을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신속한 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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