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어지럽게 날린다. 시계가 부옇고, 코에는 악취가 스며든다. 이렇게 마음이 산란할 때 달빛 비치는 고요한 산등성이를 홀로 걸어가 봤으면 한다. 바람이 분다. 대나무가 살랑거리며 말을 걸어온다. 내 가장 깊은 속에서 그 말을 알아듣고 반응한다. 달빛은 대나무 잎들에 떨어지며 반짝인다. 맑은 정신으로 어지러운 현상들을 되짚으며 정리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생긴다.

다산 선생도 때때로 달빛 비치는 대나무를 바라보았나 보다. 그에 관한 일화가 시(詩)로 남아있다.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5년째에 접어든 다산 선생에게 같은 해 유배된 친구 김이재가 해배되어 찾아온다. 그는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도성을 향해 떠나가는 몸이 되었으나, 다산 선생은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막막함에 여전히 쌓여 있었다. 실제로 선생은 그로부터 13년을 더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다산 선생은 친구를 위해 시 한편을 짓는다. 그 마지막 구절이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을 세차게 친다.

대나무 몇 그루에 달빛 비치는 날/고향 향해 고개 돌리니 흐르는 눈물(苦竹數叢他夜月/故園回首淚垂垂)

사법개혁하면 흔히들 법조계의 비리를 떠올리고, 이런 어두움이 없는 법원과 검찰을 만드는 것이 사법개혁의 요체로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진정으로 국민과 나라를 위해 충실히 봉사해온 법조인들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것도 사법개혁의 한 부문으로 포함함이 마땅하다.

미국에서는 대법원장이나 몇몇 대법관의 이름을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도 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로스쿨 학생이라도 대법원장의 성함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를 우리는 좀 더 명확하게 인식하여 제도의 개선을 꾀할 필요가 있다.

대법원장, 대법관의 사실상 단임제가 잘못되었다. 다가올 헌법개정의 기회에 충분한 고려가 됨이 마땅하다. 적어도 일본식으로 한번 임명되면 70세 정년에 이를 때까지는 계속 근무하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또 다른 원인을 찾자면, 훌륭한 법조인에 대한 사회적 존중과 예우가 다른 나라에 훨씬 못 미친다.

역대 대법원장과 대법관 중에서 기념관에 자취를 남기고 있는 분은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밖에 없다. 그것도 대법원이 주도해서 겨우 마련한 기념관이다. 그런 면에서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작년에 조영래 변호사 추모사업을 하여 그 동상을 변호사회관 앞에 세우는 등으로 노력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우리 곁에는 숭고한 법조인들이 있어왔다. 미국에서의 대법관만큼 아니 그보다 더 뛰어나고 어떤 면에서는 성스러운 면모를 간직한 분들이 계셨다. 산기슭 달빛을 받으며 흔들리는 대나무들처럼 우리의 영성을 자극하는 고결한 분들을 생각하며 눈시울만 적실 것이 아니다.

작년 10월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법원행정처의 용역을 받아 만든 ‘바람직한 법관상의 정립과 실천방안 연구’보고서에서, 법관들이 법원과 판사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결핍을 가중되는 피로감의 원인으로 꼽은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도 훌륭한 법조인들의 추모와 현창사업이 중요하다. 법관이나 검사가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며 직무에 전념할 수 있는 틀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사법개혁의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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