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취득의 기회를 주고, 지속적으로 도움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금품을 제공한 것이다.” “두 사람은 인생의 벗으로서 함께 호연지기를 키우고 우정을 나눠 왔다. 일련의 호의일 뿐이다.”

법정에서 오가는 논박의 상당 부분은 어느 것이 진정한 인과관계인지 설파하는 과정이다. 나의 인과는 정당하며, 상대의 인과는 필연적이지 않다는 증명이 계속된다. 법관은 허락된 한 필수적인 근거를 모으고, 불분명한 것들 가운데 분명한 경위를 추려 비로소 판단한다. 잘못된 인과관계의 오류가 발견되면 어느 쪽이든 끝장이다.

무엇인가가 원인이라고 선명히 말하는 일이란 가능할까. 서양철학의 한축은 사람들에게 인과관계를 관찰하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고 선을 그어 두었다. 철학을 막다른 길까지 밀어붙였다는 데이비드 흄은 “우리가 경험으로 배울 수 있는 건 그저 연접(conjunction)일뿐, 연결(connexion)은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인과관계란 반복되는 선후 사건을 접해온 습관적 관념일 뿐이다. 내일 해가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것은 진리인가 경험인가? 먹이를 가져오는 주인의 발소리를 좋아하다가, 어느날 목이 비틀리고 마는 수탉과 우리가 다른가? 의심 끝에 진리는 동어반복일 뿐이라는 결론마저 도출됐다.

이는 틀림없을 수 있을지언정 생활인들의 세계에서 유의미한 얘기는 못 된다. 근심하는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동어반복의 틀 바깥에서 원인과 결과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날카롭게 살핀다. 탈 물질과 산소, 발화점 이상의 온도는 화재에 빠질 수 없는 조건이지만 화재의 원인이라 언명되지 않는다. 그보다 분명하게 불을 낸 원인이라 일컬어지는 건 누전, 제품결함, 담뱃불 등이다. “근접과 계기가 인과의 관념을 제시한다고 만족하고 말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흄마저도 “인과관계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철학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개념은 원인·결과를 묶는 ‘필연성’이다.

시위에서 경찰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다가 숨진 백남기(69)씨의 사망진단서에는 충분조건이 있을 뿐 의미 있는 필요조건이 없다. 사인(死因)이 ‘심폐정지’로 적힌 그 사망진단서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다. 동어반복이므로, 사망과 심폐정지 사이의 인과를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다만 흄을 포함한 사람들은 뭔가가 더 진정한 인과라고, 뭔가가 더 필연적인 고리라고, 여전히 법정과 강단과 여론의 장에서 다투고 있다. 회의주의 철학은 무엇이든 겨우 조금씩만 말했지만, ‘왜(why)’를 물을 때 고작 ‘어떻게(how)’로 답하는 것을 진리의 태도라 가르치진 않았다. 의사의 덕목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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