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에 부임한 후 아이들을 스위스 초등학교에 보내게 되었다. 등교하자마자 학사일정, 교사 연락처, 매일 숙제 적는 칸과 교사와 학부모가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는 칸 등이 있는 알림장을 받아왔는데, 그 중에서도 내 이목을 끈 것은 첫 페이지에 나와 있는 ‘학부모와 학생의 권리와 의무’였다.

학부모의 권리는 ‘유급, 학교 재배치 등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학교는 학부모와 상의한다’, ‘교사는 학부모와 최소 연 1회 상담을 한다’ 등, 의무는 ‘학교를 존중하고 자녀의 교육에 대해 협조한다’ 등. 학생의 권리는 ‘모든 학생은 정신적, 육체적 보호를 받으며 각자의 존엄성을 존중받는다’, ‘자의적 차별을 받지 않는다’ 등, 의무는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수업에 참여한다’, ‘교사의 지시를 따르고 교사의 권위를 존중한다’, ‘다른 학생을 존중한다’ 등.

사실 뻔하고 당연한 내용이고, 우리나라 학교라고 그 내용에 반대할 리는 없다. 하지만 이를 덕목이나, 호의가 아닌 지방 조례에 따른 ‘권리와 의무’로 규정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교사가 학부모와 학사를 상의하고 학생을 차별하지 않는 것은 내가 훌륭한 교사라서가 아니라, 학생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교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까지 내가 경험한 스위스의 교사들은 대부분 훌륭했고 학생들을 사랑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정 없어 보이는 풍경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교사와 학부모, 학생을 상하 관계가 아닌 수평 관계, 평등한 관계로 설정하기 때문에 가능한 풍경이기도 하다. 옛날 어떤 드라마의 명대사처럼 한국 교육의 기본이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라면 스위스 교육의 모토는 “넌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야!”라고나 할까? 등교할 때는 혼주가 하객 맞이하듯 선생님이 교실 앞에 서서 등교하는 아이들 한명 한명과 악수를 하고 눈을 마주치면서 “봉주르, 폴!”, “봉주르, 이사벨!” 이름을 불러 인사를 나눈다. 이쪽 어법과 문화상 학생이 선생님을 부를 때도 ‘마담’보다는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다고 스위스 학생이 버릇없고, 이기적인 아이로 자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특히 저학년일수록 교육의 초점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아이를 길러내는데 맞추어져 있다. 초등학교 1학년도 달력 뜯기, 교실에서 기르는 햄스터 먹이주기, 줄반장 등 각자의 임무를 번갈아가면서 부여받는다. 수업시간에 배우는 수학이나 국어(프랑스어) 수준은 한국과 비교하면 눈을 의심하게 될 정도로 쉽지만, 유급제도가 있어서 초등학교 1학년도 최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2학년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1학년을 다시 다녀야 한다.

아직 한국에서 학부모가 되어 보지 않아서 내가 학교 다니던 때와는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주변에서 듣는 얘기로는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우리 아이들이 일단 공부만 잘 하면 학생의 의무는 다한 것이고, 모든 권리는 대학 간 후에 누리라는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공부를 못해서 좋은 대학에 못 갔으면 자신은 의무를 다하지 못했으니 권리를 누릴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당당한 권리의 주체로 인식하게 하고, 또 그만큼 충실히 의무를 이행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시키는, 그런 교육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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