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자고 의심만으로 기사를 씁니까? 함부로 의심하면 큰일 나는 줄 몰라요?” 한 사채업자를 향한 기업사냥 의혹 기사가 명예훼손 고소장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많은 부분에서 되레 큰소리를 칠 수 있었지만, 주먹세계에도 끈이 있다는 소문을 운운한 한 문장이 끝내 시비가 됐다. 고소인은 의심을 탓했는데 수사관은 정작 이렇게 말했다. “왜 그 부분은 또 한번 의심하지 않았습니까?” 피의자신문조서가 어디엔가 남아 있다면, 말을 잇지 못한 궁색한 시간이 기록돼 있을 것이다.

“끝까지 의심하지 못했다는 게 잘못이라면 잘못입니다. 그런데….”

법조브로커와 저녁 한번 함께한 현직 판사가 결국 사직서를 제출할 때까지, 모두가 말을 아끼면서도 동시에 모두가 할 말이 많았다. 의심이 들자마자 재판 회피 신청을 했지만, 애초부터 의심하지 못했다는 것이 부주의로 지적됐다. 이마에 브로커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이들도 아니고…, 수년간 점잖다가도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면…, 산전수전 다 겪은 율사들도 제각기 토로가 컸다. 고향 후배, 대학 동문, 하다못해 종씨…, 온갖 모양의 미끼가 서초동 바다에 드리워졌을 것이다.

많은 관객들이 기분 좋게 낚였다는 ‘곡성’을 이제야 정신없이 봤다. 보아하니 삼킬 수밖에 없는 미끼이며,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무엇이 중한지도 모르고, 선한 존재를 순전히 믿지 못해서 주인공은 그 지경이 된 듯했다. 그럼에도 주인공으로서는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말해줘도 믿지 못할 것이다….” 영화는 현혹되지 말라고 주문하면서도, 또 의심하면 끝내 해코지하고야 말았다. 현혹되지 않으려 인간이 내내 다듬어온 게 의심의 철학인데, 얼마나 가혹한 딜레마인가?

보다 완전한 의심을 요구하는 가혹한 환경은 가까이에도 펼쳐져 있다. “유죄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곧장 객관으로 인정받는 것이 단 한 가지 있다면, 대법관들의 판결문이다. 완전히 꽉찬 의심이 현혹을 막고 합리를 낳는다. 진실성을 인정받기 위해 내가 했어야 하는 일은 더욱 큰 의심이었다. 브로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법조인들이 가졌어야 할 것도 더욱 큰 의심이었다.

끝없이 의심했다면 곡성의 가족을 지킬 수 있었을까. 의심하고 또 의심한 근대 데카르트의 결론이 결국 “나는…나다”인데, 신의 모습으로 그 말을 돌려주니 고약하기만 한 영화다. 진실을 위해 많은 의심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 곡성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답답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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