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전(白兵戰)’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칼이나 창, 총검 따위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적과 직접 몸으로 맞붙어서 싸우는 전투’라고 나와 있다. 백병(白兵)은 날이 서 있어 환하게 번쩍이는 쇠붙이 무기를 말한다. 대낮의 의미인 백주(白晝)에서 흰 백(白)이 환하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의 전투 장면에서 탄환이 소진되고 나서 수 십, 수 백의 군사들이 서로 뒤엉켜 창검으로 싸우는 모습에서 나는 군 입대 전까지 백병전이 백병전(百兵戰)인 줄 알았다. 군에서 백병전에 대해 배우고, 병사들에게 백병전에 쓰이는 총검술 훈련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백병전이란 단어를 접하면 여전히 수 백(百)명의 군사가 싸우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강하게 심긴 이미지에서 비롯된 ‘연상 작용’은 이 같이 좀처럼 변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근래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재벌’이라는 단어는 ‘견과류 사건’, ‘매 값 폭행 사건’으로 우리에게 연상된다. 요 몇년 사이 다수의 법정 드라마에서 재벌 2세의 모습은 극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안하무인의 악당으로 그려진다. 아버지인 회장은 처벌을 면하기 위해 대형 로펌과 수사기관을 쥐락펴락한다. 피해자의 가족들은 오열하지만 재벌가의 귀에는 타인의 울음소리를 느끼는 청(聽)세포가 선천적으로 없어 보인다.

법정 드라마는 리얼리즘을 위해 현실의 모습을 투영한다. 태안 기름 유출 사고와 같이 실제 사건이 모티브가 되기도 하고, 건설사들의 하도급 비리 현실이 극 중 대사를 통해 고발되기도 한다. 실제 대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이야기만 나온다면 법정 드라마의 사건 전개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극적 상황의 한 가운데 주인공 변호사가 등장하는데, 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주인공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 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것이다.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법정 드라마에 이러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변호사란 이름을 서민의 보루(堡壘)로 연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것이 실제와는 거리가 있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라도 말이다.

최근 거액의 수임료, 전관 변호사의 로비 의혹이 세간의 화두(話頭)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수년 간 법정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쓰였다. 그래서인지 요즘 뉴스를 보면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변호사에서 연상되는 이미지가 날로 어두워져 가고 있다. 드라마에서처럼 서민들의 눈물 어린 박수를 받는 변호사가 날로 많아지길 기대해 본다. 드라마틱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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