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 다니는 친구 녀석이 오랜만에 소식을 전했다.

“수영아. 사실은 나 강등당했다. 벌써 2년이 넘었고… 이제 버틸만하니까 말하는 거야. 그동안 마음고생이 말이 아니었거든.”

녀석의 얼굴은 말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상기되기 시작하였다. 울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됐냐.”

내가 쿨하게 물었다.

“본부장에게 밉게 보인거지. 강등처분을 하는 것은 나보고 회사에서 나가라는 거 아니겠냐. 후배들 보기도 창피하고. 처음엔 바로 사표를 내려다가 그냥 꾹 누르고 다니다 보니, 또 적응이 되더라고.”

녀석은 울분이 올라올 때에는 혼자서만 술한잔 한다고 했다. 친한 동료하고도 술자리는 피한다고 했다. 말실수가 염려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녀석은 계속 말을 해댔다. 그리고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자리를 파할 시간이 되었다. 또 연락하겠다는 친구 녀석은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내려와보니 알겠더라. 내가 얼마나 싸가지가 없었는지… .”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 제목이 생각이 났다. 멈추어야만 보이는 것이 있다. 그리고 올라갔을 때나 내려왔을 때 보이는 것은 같지 않다. ‘경쟁은 오직 오르막길에만 있는 것 아닐까?’ 나는 항상 먼저 오르는 사람이 우등생이었던 시절을 살았던 것 같다. 멈출 줄을 아는 사람, 내려올 줄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좀처럼 해 보지를 못했다. 고은의 시 중에는 ‘내려갈 때 보았네’가 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처음 시인 고은의 저 시를 접했을 때, 나는 ‘그 꽃’을 보고 싶었다. 내려갈 때만 있는 ‘그 꽃’은 내인생의 어디에 자리잡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멈추면 보이는, 내려갈 때 보이는, 올라갈 때 보이는 ‘그 꽃’은 저마다 다른 ‘그 꽃’이다. 삶은 올라가고, 멈추고, 내려가는 3박자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인생을 소풍이라고 말한 이는 저 ‘그 꽃’을 다 보았음이 틀림없다. 그날 밤 나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몇 번이고 읊조렸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살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그리고 멈추는 삶과 내려가는 삶을 사랑하기로 했다. 오늘밤 친구 녀석은 그 말을 해 주려고 나에게 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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