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묵 변호사

1918년생인 이사묵변호사님<사진>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이제 파란만장한 시절(일제, 해방, 6·25 전쟁 등)을 보낸 원로선배들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

이사묵 변호사는 청년시절 그가 살아온 시절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이다. 그분의 삶을 추적하다 보면 대학시절 읽었던 최인훈의 광장이란 소설이 생각난다.

이 변호사는 1936년 익산 이리농림고등학교 졸업하고, 1941년에는 그 어렵다는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를 합격한 후 평안남도 사회과장, 영원군수 등을 지냈다. 해방 후에 사법요원양성소 입소시험에 합격해서 사법관시보를 거쳐 1948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이 되었다. 이 때는 나라가 좌우로 대립하여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절이었다. 국회프락치 사건에 이어 1949년 법조프락치 사건이 발생하여 남노당 프락치라는 검찰의 지목을 받아 구속기소가 되었다. 그러나 1심에서 기소된 다른 판, 검사, 변호사들과 함께 무죄(구형 3년)를 선고받았다. 검찰은 당연히 항소를 하고 얼마 후 한국전쟁(6·25)이 일어나서 다른 피고인들은 모두 월북하였다.

이 변호사는 무죄취지에 맞게 월북을 하지 않았고, 1·4후퇴때 부산으로 피난을 와서 명예회복을 위하여 항소심 재개를 요청하였으나 대부분 피고인들이 행방불명이라 재개되지 못하였고, 사건을 담당하였다는 정희택 검사가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항소를 취하하였다. 법률신문사 법조50년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살아 계셨을 때 인터뷰를 했다면, “만일 그때 남쪽이 아닌 북쪽을 택했더라면 어떠셨겠어요” 라고 물어보고 싶은 부분이다. 최인훈의 광장에서 주인공은 남도, 북도 택하지 못하고 제3국을 선택했었다. 북한이 잘살고 있으면 멋있는 결론인데, 지금의 북한을 보면 이사묵 변호사가 가장 잘한 선택이다.

이 변호사는 누명을 벗고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변호사로 개업을 하였다. 상당히 학구적이었는지, 해방후 다시 서울법대(1949년)와 서울대학원(1952년 석사)을 마쳤고, 늦게 1980년에는 동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1950년 초반에는 남창중학교장, 창녕중·농업고등학교장, 동아대학교 교수도 역임했다.

사회가 안정된 이후에는 그가 변호사를 하였다는 기록이외에는 특별한 기사가 뜨지 않는다. 슬하에 두신 2남5녀를 훌륭하게 키우면서 보내셨을 것이다.

원로가 되신 이후에는 곽명덕 변호사가 만든 원로법조회의 공동대표(류택형, 용태형 변호사님과 공동)를 맡으셨고, 많은 원로 선배들이 그런 것처럼 명동에서 공증사무실을 운영하시면서 조용한 노후를 보내신 것 같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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