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파리에서 벌어진 IS 테러로 139명이 사망했고 이에 분노한 프랑스 올랑드 대통령이 평소의 온건한 모습을 버리고 시리아 내 IS 본거지에 대규모 공습을 하면서 IS에 전쟁을 선포했다. 톨레랑스(관용)의 나라 프랑스의 평소 이미지, 올랑드의 온건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국가 차원의 강력한 대응을 한 터라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상식상 이해할 수 없는 테러행위를 하는 IS는 어떤 조직이며, 어떻게, 왜 그런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인가를 살펴보며 갈등관리의 중요 노하우를 함께 생각해 보려 한다.

IS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겠지만, 이 글에선 오사마 빈라덴·알카에다가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상징적 빌딩 뉴욕트레이드센터를 공격해 수천명의 인명을 앗아간 사건에서 시작해 본다. 당시 워싱턴 DC 미 연방정부 수뇌부까지 공격을 시도한 데 대해 분노한 부시 대통령은, 그 배경에 빈라덴·알카에다 외에 이라크·후세인도 깊이 관여해 있다고 오판하여, 이라크를 침공해 후세인 정권을 궤멸시키고 집권층과 그 기반인 수니파를 몰아낸다(1979년부터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이란은 시아파가 지배하고 있는데, 중동은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눠져 있고, 수니파는 미국이 시아파 이란을 견제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었다).

당시 높은 교육수준과 국가경영능력을 지녔던 이들은 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라크의 석유생산요지 등 주요 거점을 확보하고 세계적 규모의 반서방, 반USA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시아파를 견제하던 미국의 우군이 적으로 변한 것이다.

이는 1989~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후세인을 응징하는 데저트 스톰 작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해 불과 3일만에 이라크 정예부대를 궤멸시키고도, 미군을 바그다드 20km 전방에서 멈추고, 후세인 정권이 계속 유지되도록 해, 중동의 균형과 질서를 유지시킨 아버지 부시 대통령(1986~1990 집권)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의 자제력과 지혜는 아들 부시 대통령(2000~2008 집권)의 걷잡을 수 없는, 사려깊지 못한, 실력과시에 집중하는, 무모한 등으로 나타는 성격과 극단적으로 비교된다 하겠다.

그렇다면 IS는 어떻게 서방 선진국들(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의 젊은이들을 동원해 시리아, 이라크 등으로 집결시키고, 서방 세계 곳곳에서 테러행위를 하게 했는가? CNN은 IS가 구글, 페이스북 등을 이용해, 직업이 없이 놀고 있는, 그래서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는, 20대 젊은이들을 공략한 내용을 취재했다. 취재 결과에 따르면 IS는 이들 내면에 쌓인 불만 분노를 이용해 신입회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파리 테러에 대한 응징으로 전쟁 선포 후 시리아 내 IS본거지 등을 집중 공습하고, 미국, 영국, 러시아 등과 연대해 IS를 궤멸시키려는 올랑드 대통령의 접근법은 과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많은 전문가들은 그리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보지않으며, 일시적인 승리·성과에 그칠 뿐이라 예상한다. 중심에서 밀려나 철저히 좌절한, 후세인 정권 수니파 집권세력, 중동에 널리 퍼져있는 동조세력, 그리고 서방 선진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기득권에 대한 내재적 분노가 가득차 있는 젊은 세대들, 특히 아랍계 이민 젊은이들은 IS의 현 근거지가 일시 붕괴된다 할지라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할 테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갈등해결에 대한 구조적 접근법의 필요성이다. 전략적 접근법, 행태주의 이론 접근법, 절차적 이론 접근법 등도 유효하겠지만, 구조적 문제에 대한 깊은 숙고와 개선 노력이 없는 접근법은, 일시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라도, 비슷한 현상이 계속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런데 구조적·근본적 문제해결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가진자와 피해자가 모두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인류가 수렵사회에서 농업사회, 도시사회로 진입한 후 시도한 다양한 구조적 접근법 제도들은 진화하고 있다. BC 1995년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귀에는 귀’ 접근법은 인류사회의 엄청난 진보를 상징한다. 힘있는 자, 가진 자가 피해를 봤을때, 약자에게 과도한 응징을 해서는 아니 되고, 꼭 피해받은 만큼만 응징을 하라는 뜻이다. 분노의 자제를 강력히, 구조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인류역사를 BC와 AD로 나눈 예수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산상수훈에서 “누가 왼쪽 뺨 치거든 오른쪽 뺨도 내밀라” “속옷을 달라거든 겉옷도 줘라” “권력 가진 자가 5리 행군을 요구하면 10리를 가 줘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놀랍게도 이를 행하는 사회 즉 자제, 겸손, 용서, 배려, 합의도출, 감사표시, 사과를 할 줄 아는 사회와 국가가 지금 세상을 리드하고 있으며, 인류역사에 유례 없는 풍요를 구가하고 있다. 우리사회가 배우고 따라야 할 중요한 삶의 길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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