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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에게 듣다]공공(公共)
김성기 변호사  |  ksk@swla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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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7호] 승인 2015.11.23  09: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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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변호사의 머릿속에 있는 변호사 상(像)이라 할까 이미지라고 할까, 그것은 이미 한 세기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미지는 지난 세기 이 나라의 근대화(文明開化)와 더불어 생겨난 것이고 우리는 그 이미지를 백년이 넘게 우려먹었다. 그 이미지는 변호사로 하여금 오직 자신의 성공만을 믿는 자기모방(自己模倣)의 길을 걷게 했다. 그러면 앞으로의 백년, 이백년도 같은 이미지를 계속 우려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지난날의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애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너무도 단순한 사고회로에서 나온 불건강한 사상임에 틀림없다. 변호사를 제외한 우리 사회의 어떤 사람도 변호사에 대한 옛날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옛날의 이미지, 그것은 백년의 시간의 흐름과 함께 지금은 오히려 부(負)의 이미지가 되었고 우리에게는 짐이다. 이제는 이러한 부의 이미지의 청산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에 맞는 합(合)시대적인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변호사가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가치를 찾아내야 한다. 무엇이 공통의 가치가 될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그것을 위해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런데 변호사는 변호사의 수가 지금에 비해 한 줌에 불과했을 때의 질서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당시의 질서는, 변호사는 이 사회의 ‘최고의 엘리트’이고 마땅히 ‘누리는 계층’이었다. 그 질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불건강한 사상에서 만들어진 부의 이미지이고 이미 무너진 질서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변호사는 그 무너진 질서에서 아직도 병적인 향수를 느낀다. 과거의 질서에 대해 무한한 애착을 갖는 이 노후화한 질서의식은 상상력의 장해가 된다. 그 때문에 변호사는 이 무너진 질서에서 유래한 고정관념에 스스로를 묶어 놓고 있다. 그 고정관념이 점차 신념화하고 나아가 신앙화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결과 그 고정관념에 반하는 어떤 지식이나 정보에 대해서도 거절반응을 보일 따름이다. 이제는 그것이 마치 유전적 결함처럼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변호사는 스스로의 운명의 위치와 방향을 잃었다. 방향을 상실한 일상에는 초조와 권태가 찾아온다. 이것이 변호사의 현실의 모습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제는 행동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야 한다. 목표와 구상을 세우고 그것을 향해서 사고와 행동을 오로지 집중시키는 능력, 그것이 바로 행동자로서의 자질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행동자로서의 자질은 ‘공공’이라는 가치를 수용하고 존중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공공’이라 함은 ‘나(自己)이외에 남(他者)이라는 존재를 인정하는 것’, ‘나와 남이 어울려 우리(社會)가 됨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나와 남과의 관계(유대) 나아가 우리 속의 나의 역할(유대)에 가치(道德)를 부여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변호사는 먼저 이 ‘공공’이라는 가치를 변호사 사회의 일반적 도덕으로서 수용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변호사는 서로를 묶는 ‘그 무엇’인가를 비로소 찾게 된다. 이것이 결국 사회 전반을 향한 새로운 변호사의 이미지(像)의 창출이다.

그런데 걱정이 있다. 변호사는 ‘공공’이라는 가치에 대해 알 수 없는 거절반응을 보인다는 것. 그것이 이제는 태생적인 혐오감으로 바뀌어 있다. 그 이유를 모르겠다.

변호사는 누구나 자신의 ‘고객’을 타자(他者)로 인정한다. 그 고객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고객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 거기서 전문직으로서의 자부심을 찾고 있다. 그러나 특정 고객과의 ‘타자로서의 관계’에만 매달릴 뿐 그 고객이 속해 있는 집단(사회)의 또 다른 타자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 결과 이 사회의 모든 타자와의 사이에서 ‘타자로서의 관계’는 형성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고객이라는 하나의 점(点)만 알 뿐 점과 점을 이으면 선(線)이 되고 선과 선이 중복되면 면(面)이 되며 또 면과 면이 쌓이면 층(層)이 된다는 아주 간단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한번 생각해 보자.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고, 면이 결국 층이 되는 이 전체 과정이 ‘공공’이 아니고 무엇인가. 변호사는 이 ‘공공’에 집을 짓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곳이 ‘살만한 곳(卜居之地)’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것으로 변호사 서로를 묶는 ‘그 무엇’에 해당하는 유대(가치 또는 도덕)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 가치와 도덕이라면 변호사는 합 시대적인 변호사 상, 이미지를 만들 수 있고 비로소 앞으로의 백년, 이백년을 행해 부끄럽지 않은 엘리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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