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18일 폴란드 바르샤바. 제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결선 무대. 세계 각국의 피아니스트 160명이 참가해 예선과 본선을 거쳐, 오직 10명만이 결선에 진출했다. 그 중 한국인이 있었다. 그는 결선 무대 첫 연주자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지휘자의 손이 올라갔다. 오케스트라는 쇼팽 피아노 협주곡 제1번 서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는 덤덤하게 관현악 연주를 듣고 있었다. 5분여의 서주가 끝났다. 그가 연주할 시간이 되었다. 손가락이 빠르게 하얀 건반 위를 오갔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너무 애가 타서 마치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표정으로 몰입하기 시작했다. 감정은 격정적으로 타올랐다. 1악장이 끝난 뒤, 그는 지휘자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1830년 10월 11일 바르샤바의 한 연주장. 그곳에서 고국 폴란드를 떠나는 청년 피아니스트의 고별 콘서트가 열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사랑하고 있던 여인을 생각하면서 만든 곡이었다. 밤하늘의 별이 그 여인에게 쏟아질 듯이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그 여인은 방금 독창을 끝내고 무대 뒤에서 조용히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던 후배 소프라노였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쇼팽(Chopin)이었다. 그 때 쇼팽의 나이, 겨우 스무 살이었다.

2015년 10월 18일 바르샤바의 쇼팽 콩쿠르 연주장. 피아노 협주곡 제1번 2악장이 시작되었다. 느리고 달콤한 로만체(Romance)다. 로망스가 느껴진다. 즐거운 추억과 낭만을 떠올리게 한다. 다시 3악장으로 이어진다. 물이 흐르듯 가볍고 쾌활한 론도(Rondo)다. 소리가 한 음 한 음 살아서 통통 튀고 영롱했다. 피아니스트의 온 몸이 쇼팽의 극적인 삶과 시적인 감성을 가득 담고 있는 듯 했다. 피아노란 악기가 표현할 수 있는 낭만성과 서정미를 한껏 보여주었다. 연주 기법에서도 완벽한 디테일을 선보였다. 기교나 스타일도 무척이나 개성적이었다. 그는 40분에 걸쳐 침착하게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연주했다.

쇼팽 콩쿠르는 피아노 분야 최고 권위의 연주 대회다. 폴란드 정부가 ‘피아노의 시인’ 쇼팽을 기리기 위해 1927년 시작한 콩쿠르다. 오로지 피아노 부문만 있다. 전 세계 16~30세의 젊은 연주자들만 참가 가능하며, 쇼팽의 피아노곡으로만 서로 실력을 겨룬다. 5년에 한 번씩 개최하기 때문에, 피아노의 올림픽으로 불린다. 심사 기준이 엄격해 1등 우승자가 없는 경우도 있다. 1990년 12회 콩쿠르와 1995년 13회 콩쿠르 때는 우승자가 나오지 않았다. 피아니스트가 꼭 이루고 싶은 꿈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쇼팽 콩쿠르 우승자가 되는 것이다.

2015년 10월 20일 밤 바르샤바. 제17회 쇼팽 콩쿠르에서 1등 우승자로 한국인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쇼팽 콩쿠르 역사상 한국인 최초 우승이었다. 박세리의 LPGA 골프 우승, 김연아의 피겨 스케이팅 올림픽 금메달과 맞먹는 감동을 주었다. 우승자는 한국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이었다. 그의 나이 겨우 스물한살이었다. 쇼팽 콩쿠르는 그에게도 어릴 적부터 꿈이었다. 11살 때부터 꾸어 온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출전을 선언한 뒤 9개월간 쇼팽만 연주하고, 쇼팽처럼 살았다. 21세의 한국인 쇼팽이 20세의 폴란드인 쇼팽과 피아노 건반 위에서 서로 만난 것이다.

일본 만화 중 ‘피아노의 숲’이라는 만화가 있다. 주인공인 피아니스트 이치노세 카이는 어릴 적 매춘의 거리에서 살았다. 숲에 버려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위로를 받았고, 숲의 피아노는 자신이었고 유일한 친구였다. 피아노의 숲에서 카이와 조성진이 만났다. 둘은 나이도 비슷했다. 두 사람 모두 쇼팽 콩쿠르 우승자였다. 둘 다 어릴 적 꿈을 이루었다. 하지만 우승하는 방법은 달랐다. 카이는 만화라는 가상의 콩쿠르에서 우승했지만, 조성진은 현실의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둘이 만나 함께 피아노 앞에 앉았다. 콧숨을 들이쉬는 순간, 네개의 손가락이 동시에 하늘로 솟구쳤다. 건반 위로 수없는 물방울이 알알이 튕겨져 올라가는 소리가 보였다. 그 숲에 피아노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 숲을 ‘피아노의 숲’이라고 불렀다. 그 숲에서 쇼팽을 만날 수 있다. 난 지금, 그 숲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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